"조선 사람은 즉흥곡의 명수로, 바이런이나 워즈워드에 못지않은 시인들…."
개화기 미국 선교사 호머 헐버트(1863~1949)는 팔도 어디서나 들려오는 아리랑을 두고 이렇게 예찬했다. 최근 내한한 독일 재즈 그룹 '쌀타첼로'의 피아니스트 페터 쉰들러는 한 술 더 뜬다. "모차르트 음악은 순식간에 지나가지만 아리랑에는 소리의 근원인 에너지가 있다."
아리랑에 대한 경탄과 찬사는 이밖에도 허다하다. 하지만 그 기원과 전모는 여전히 연무 속 봉우리처럼 신비에 가려있다. 최초의 민요론을 세운 고정옥(1911~ 1969)은 '조선민요연구'에서 "최초 단 한 개의 멜로디에서 출발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라고 추정했다. 50여 종에 6000여 수라는 집계는 있지만 아직껏 전모는 밝혀진 바 없다. 최근 국제문화재단이 펴낸 신간 '한국의 아리랑 문화'(박이정)는 그동안 알려진 것들의 총정리에 해당한다.
◇아리랑의 기원…설만 분분
아리랑의 형식은 단출하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라는 받는소리(후렴)를 바탕으로 사설을 섞어가며 부르는 돌림 노래다. 노랫말은 천태만상이다. 아리랑을 삶의 노래, 삶의 문학이라 부르는 이유다. 진도 아리랑 같이 아련한 가락이 있는가 하면, 밀양 아리랑처럼 흥겨운 것도 있다.
첫 기록으로는 1790년 필사한 이승훈 문집에 '아로롱 아로롱 어희야'라는 농요 시구가 전해온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야'의 한자 음차로 보인다. 아리랑이란 음가가 기록된 곳은 황현의 매천야록. 1894년 정월 고종이 불길한 꿈을 꾼 후에 소리꾼을 불러 '아리랑타령(阿里娘打令)'을 부르게 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1865년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전국에서 동원된 일꾼들 사이에서 유행가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1896년 헐버트는 '코리아 리파지터리'에 최초로 아리랑 악보와 영문 번역 가사를 남기면서 "포구의 어린애들도 부르는 조선인의 희로애락이 녹아 있는 노래"라고 썼다.
◇기폭제는 나운규의 무성 영화
가장 널리 알려진 아리랑은 경기 지방 민요인 '본조 아리랑'이다. 1926년 나운규(1902~37) 감독·주연의 무성 영화 '아리랑'의 주제곡으로 퍼졌다. 주인공이 '아리랑 고개'에서 이별하는 장면 뒤로 흐른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난다'에 전국이 들끓었다. "단성사가 터질 듯했다. 날이 갈수록 만원이었다. 마치 어느 의열단원이 서울 한구석에 폭탄을 던진 듯한 설렘을 느끼게 했다."(나운규와 활동했던 이경손의 회고)
◇일제도 아리랑 활용하려 들어
아리랑은 이후 장르를 넘나들었다. 라디오 드라마 '그 후의 아리랑', 무용가 최승희의 '아리랑 리듬' 공연이 이어졌다. 경성에 '싸롱 아리랑', 신의주에 '카페 아리랑'이 문 열었다. 예술단 '꾀꼬리아가씨 아리랑총각'에 남성중창단 '아리랑뽀이스'도 인기였다. 그 일원이 '오빠는 풍각쟁이'의 작곡가 김해송이다.
1930년 2월 경기도 이천경찰서가 뿌린 전단에는 아리랑을 응용한 종두선전가가 담겼다. "호열자 염병엔 예방주사 /마-마 홍역엔 우두넛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가 났네/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천하에 일색인 양귀비도 /마-마 한번에 곰보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가났네 /아리랑 고개서 우두 넛세." 일제는 1935년 '비상시(非常時) 아리랑'을 유포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비상시 이때를 알아있나 /나라가 있어야 집이 있고 /집 있은 연후에 몸을 두네 /세계에 비춰라 태양마음 /평화의 깃발을 휘날리자."
하지만 아리랑은 항일투쟁의 노래였다. 1943년 6월 임시정부가 발행한 '독립신문' 창간사는 "과거 조선의용대와 현재 한국광복군의 깃발이 중국 각 전장에서 휘날리고 있고, 아리랑 노래는 화남에서 화북에 이르기까지 울려 퍼지고 있으며…"라고 적었다.
◇외국인도 사로잡은 보편적 매력
아리랑의 세계성을 처음 거론한 이는 1950년대 말 작곡가 이흥렬(1909~1981). "아리랑의 곡조는 간단하고 단순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 있다. 다른 민요보다도 유난히 외국에 소개될 수 있었던 까닭"이라고 썼다.
해방 후에는 미군이 거들었다. 1945년 미 제29사단이 발행하는 'KOREA GRAPHIC(코리아그래픽)'에 아리랑이 소개됐고, 각종 위문 공연의 단골 메뉴였다. 위문공연차 방한했던 미국 재즈음악가 오스카 패티포드는 아리랑을 편곡해 찰스 밍거스 베이스 연주로 'A-Dee-Dong Blues(아-디-동 블루스)' 음반까지 냈다. 1960년대 컨트리 음악 대부였던 피터 시거의 라이브 음반에도 벤조 연주 아리랑이 들어갔다.
1964년 내한 공연 때 냇 킹 콜(1917~ 1965)이 부른 '아레이-라잉'은 라이브 앨범에 고스란히 담겼고, 1965년 폴 모리아 악단은 '아리랑'을 정규음반에 실었다. 최근 내한 공연한 노르웨이 가수 잉거 마리는 "아리랑은 열린 선율을 가진 치유적인 노래"라고 했다.
한민족아리랑연합회의 김연갑 상임이사는 "전통성과 보편성을 함께 갖춘 아리랑의 창조력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라며 "이에 대한 접근법도 통합 또는 통섭으로 확장돼야 한다"고 했다.
▲17일자 A27면 아리랑 기사 관련 사진 설명 중 '나운규 감독·주연의 영화 아리랑'은 1957년에 리메이크된 '김소동 감독의 영화 아리랑'의 잘못이기에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