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는 키가 크고 손도 크거든. 그리고 약간 야수적이에요. 부산 피란 시절 부산지역의 한 작가가 연못과 소나무를 그린 김환기 그림을 가리켜 'X(남성의 성기를 이르는 비속어) 같다'고 모욕을 줬어요. 자리를 옮기고 식사 자리에 그 작가가 앉으려고 하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김환기가 느닷없이 일어서며 어퍼컷을 먹였죠. 코를 쳐서 피가 쏟아지니까 옆에 있던 권옥연이가 막 울었지요. 평소엔 참 부드럽지만 과격한 데가 있는 사람이었어요, 김환기는."

이 양반, 1922년생이다. 우리 나이로 아흔. 얼핏 보기엔 70대. 젊어 보이는 외모만큼이나 그의 기억은 또렷했다. '화가 백영수'가 생존해 있다는 것은 우리 화단의 축복이다. 그는 1947년 김환기가 주축이 돼 결성, 유영국·이규상·장욱진·이중섭 등과 함께 활동한 신사실파(新寫實派) 동인 중 유일한 생존자다.

백영수 화백은 의정부 자택 거실 천장 아래 판자를 대고 다락을 만들었다. 높은 곳에 올라가 아래를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 아흔 살 고령에도 다락에 올라서면 소년처럼 힘이 넘친다.

프랑스에서 30여년을 살던 그는 연초 부인 김명애(63)씨와 함께 영구 귀국했다. 도불(渡佛) 전, 의정부 집을 지은 것이 1973년. 그해 도봉산에서 캐와 심었던 아기 소나무가 어느새 훤칠한 낙락장송이 됐다. "김광섭 시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구절 있잖아? 친구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가 새삼스레 생각이 많이 나서 유럽생활을 접었어요."

그의 친구 중 대개는 이미 세상을 떴다. 그 중 한 명이 '국민 화가' 박수근이다. "박수근은 눈이 많이 나빴지요. 신호를 못 봐서 건널목 건너기가 힘들 정도였어요. 키도 크고 덩치도 컸는데 동작도, 말도 느렸어요. '가자' '먹자' '일어나자' 항상 토막말을 했지요. 밥풀을 짓이겨 캔버스에 발랐다가 밥풀이 마르면 그 위에 그림을 그렸어요. 독특한 마티에르(재질감)를 얻기 위한 기발한 아이디어였죠."

경기도 수원 출신의 백 화백은 두 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홀로 된 어머니와 일본 오사카로 이주했다. 오사카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광복 직전 한국으로 돌아왔다. 1946년 화가이자 미술평론가인 근원 김용준의 소개로 김환기를 만났고, 6·25전쟁통의 부산에서 광복 이후 미술가들의 '출구(出口)'이자 당시의 '아방가르드(전위)'였던 신사실파 운동에 가담했다. "우리는 '새로운 사실'을 그렸지. 당시 한국의 서양화란 서구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그림을 흉내 내는 것이 주를 이뤘어요. 그런데 그림은 흉내가 아니라 창작이잖아. '사생'을 하더라도 다른 방법으로 새롭게 표현할 방도가 없겠나. 그 고민을 거쳐 의기투합했죠." 그렇게 탄생한 '신사실파' 그림들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반(半)추상화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1947년 조선종합미술전 심사에 참가한 한국 현대미술 1세대 작가들. 왼쪽부터 박고석 백영수 김환기 이마동 이상범.

백 화백의 트레이드마크는 고개를 기우뚱하게 옆으로 눕히고, 다정하게 볼을 비비는 어머니와 아이를 그린 '모자상(母子像)'. 그림 속 어머니는 젊은 시절의 부인을 모델로 했고, 아이는 백 화백 자신을 상징한다. "'모자'가 꼭 어머니와 아들만 뜻하는 게 아니죠. 아내와 남편관계도 '모자'와 마찬가지 아닌가. 남자란 항상 여성에게서 모성을 갈구하니까 남편이 '큰아이'인 셈이죠." 첫 결혼에 실패한 백 화백이 지금 부인을 처음 만난 것은 1967년. 미대 입시생이었던 부인의 미술 교습을 맡은 것이 인연이 됐다. 둘 사이에는 딸(40)이 하나 있다.

파리 요미우리 화랑의 전시 제의를 받은 백 화백은 1977년 프랑스로 건너갔다. 4년 만에 파리 시내에 아파트를 구입할 만큼 돈도 벌었고 10여년간 100여회 전시회를 열었다. 그러나 불행도 그를 찾았다. 1989년 큰 교통사고로 간이 파열됐고, 1994년엔 위암 선고까지 받았다. 10여년간 투병해 겨우 몸을 추슬렀다. "지금은 계단 올라갈 때 숨이 차긴 하지만 건강은 괜찮아요. (부인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 참 잘하니까. 내가 위를 잘라내서 하루에 조금씩 다섯 끼를 먹거든. 근데 그걸 어김없이 다 해줘요."

그에게는 건강의 비밀 하나가 더 있는 듯하다. 바로 무한한 상상력이다. "세수를 하거나 밥을 먹을 때도 머릿속에선 그리고 있어요. 하다못해 길가다가 돌이 하나 떨어져 있는 걸 봐도 '아, 이 위치에 있어서 참 좋구나' 하는 감각적인 게 있단 말이죠. 머리가 항상 그림 속에 잠겨 있어요." 그는 요즘 큰 캔버스에 작은 창을 그리는 '여백' 시리즈에 빠져 있다.

회고(回顧)가 그의 소일거리 중 하나. '살아 있는 한국 근·현대 미술사'인 그에게 옛이야기를 청하는 사람이 많다. "장욱진은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사람이야. 이중섭은 얼굴이 잘생겼지. 하얗고, 정돈된 얼굴…. 김환기는 손재주가 좋았어요. 손수 가죽을 잘라 부인 핸드백을 만들어줬는데, 얼마나 멋있는지 나는 어디서 사온 건 줄 알았어요."

그에게 "그럼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라고 물었다. "아내가 나더러 '에고이스트에 고집이 세다'고 해요. 그런데 작가에겐 고집이 있어야 해요. 자기 생각을 강렬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작품이 내용도, 형체가 없어지지. '에고이스트'란 것도 '저만 안다'는 거라기보단 '제 일 열심히 한다'는 거겠죠. 아내도 속으론 날 정말 '에고이스트'라고 생각하진 않을 거예요.(웃음)"

그의 그림을 보려면 30일까지 서울 부암동 환기미술관에서 열리는 기획전 '樹話 김환기가 만난 사람들Ⅰ'에 가면 된다. '모자상'(2003)을 비롯한 그의 작품 6점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