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 때마다, 넘어지려 할 때마다 생각했어요. 하나님께서 다 주시는데 내가 왜 걱정하나…."
공주사대를 나와 교사로 26년을 근무했다. 1991년, 안정적이고 행복했던 교직생활을 돌연 박차고 생면부지의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떠났다.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 남쪽으로 130㎞ 떨어진 포체프스트룸의 빈민가에 정착했다. 그 뒤로 20년간 그곳 사람들과 살았다. 결혼도 않고, 가난한 이들을 먹이고, 유치원을 세워 아이들을 가르치고, 에이즈 고아들을 거둬 길렀다. 김용애(67) 선교사, '포체프스투룸의 억척 엄마'다.
오는 11일 연세대 '언더우드 선교상'을 수상하는 김 선교사를 최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났을 때, 그녀는 얼굴과 손목 등에 아직 남아 있는 흉터들을 보여줬다. "지난 7월 12일 자정쯤이었어요. 숙소에 흑인 강도 6명이 들이닥쳤죠. 매주 약 2500명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거든요. 그러니까 대단한 부자라도 된다고 생각했나 봐요." 강도들은 김 선교사를 의자에 앉혀 두 손을 뒤로 묶고 5시간 동안 때리고 위협했다. 이들은 결국 약간의 음식과 옷가지, 먹을 것을 나눠줄 때 쓰는 자동차를 빼앗아 동트기 전 달아났다.
치료를 위해 한국에 휠체어를 타고 돌아온 김 선교사는 두 달간 입원했다가 최근에야 퇴원했다. "사고 소식이 현지 신문에 대서특필됐다더군요. 몸도 다 나았으니 이제 돌아가야죠." 마치 아무일도 아니라는듯 김 선교사가 해맑게 웃었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다.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올랐고 살이 썩어들어가듯 퍼렇게 물들었다. 제대로 된 약도 없던 시절이었다. "의사가 '집에 데려가서 죽으면 묻어주라'고 어머니에게 절 안기셨대요. 하지만 어머니는 차마 묻을 수가 없어서 나를 눕혀 놓고 밤새 기도하셨다더군요." 하룻밤 뒤, 기적처럼 다시 숨이 붙었다. 어릴 때부터 이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김 선교사는 "하나님이 원하시면 모든 걸 다 버리고 따르겠다"고 결심했다.
그렇지만 서울 연희동 원천교회를 다니던 1990년 처음 아프리카 선교사 제안을 받았을 때는 거절하고 싶었다. 가기 싫다고 울며불며 여섯달 동안을 매달리며 기도했다. "안 갈 수가 없었어요. 하나님이 나를 필요로 해서 살려두셨는데, 하나님과 약속을 어길 수는 없잖아요." 1991년 2월 28일 학교에 사표를 내고, 3월 4일 남아공행 비행기를 탔다. 47세 때였다.
처음엔 한숨과 눈물뿐이었다. 학교 운영자로 초빙된 줄 알았는데, 정작 현지엔 함께할 교사도 학교 건물도 없었다. 맨바닥에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했다. 하지만 김 선교사는 "억지로 기부를 요청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필요한 것이 생기면 그때그때 하나님이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착 3년 만에 구제와 선교 사역의 본부 격인 '포체프스트룸 뉴 비기닝 센터(PNBC)'를 세울 땐 병상의 아버지가 건물 부지를 기부했다. 돈이 필요할 때면 어디선가 기부가 들어왔다. 현지인들에게 나눠주는 음식도 모두 현지에서 기부받아 해결한다. 대형 수퍼마트 체인이 유효기간이 얼마 안 남은 빵, 채소, 고기, 조리 음식 등을 하루 소형 트럭 한 대 분량씩 넘겨준다. 닭공장에서 매주 월요일 닭을 한 차 실어오고, 현지 언론에 보도된 에이즈 보육원 기사를 보고 한 달에 10㎏짜리 옥수수 100포대를 기부하는 독지가도 생겼다.
지금은 PNBC 건물에 냉동고가 13개나 되고 일주일에 학교 3곳, 교회 5곳 등을 통해 2500여명의 흑인 빈민들에게 음식을 나눠 줄 정도로 규모도 커졌다. PNBC에서는 교회와 유치원, 목사 자격증을 줄 수 있는 신학 코스, 직업훈련학교, 에이즈 보육원 등을 운영한다.
선교는 쉽지 않았다. 흑인들은 "백인의 신은 죽어도 안 믿겠다"고 버텼다. "예수님이 흑인이냐 백인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김 선교사는 말한다. "저 하늘의 해는 흑인의 해인가요, 백인의 해인가요? 태양이 어떤 인종의 것도 아니듯,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구하러 세상에 오신 거예요." 신기하게도 동양에서 온 자그마한 체구 여성의 말에 흑인들이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현지 교회도 9곳이나 개척했다.
남아공에는 에이즈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아이들이 많았다. 부모에게서 에이즈를 물려받은 아이들은 제대로 된 치료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열 살도 되기 전에 죽어갔다. 김 선교사는 아이들에게 부모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에이즈 고아 여섯 아이를 위탁받으면 집 한 채를 주는 방식을 고안했다. 현재 6채가 완공돼 6가족이 입주했고, 2채가 건설 중이다. 목표는 50채로 잡았다. 최소 300명의 에이즈 고아들이 새 부모를 만나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온 삶에 정말 후회는 없을까. "한 번은 하나님께 막 떼를 부렸어요. 너무 힘들다고. 왜 나한테 이렇게 힘든 일을 시키시냐고. 그때 '내가 네게 준 것이 부족하냐'고 물으시는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어요. '아뇨 모든 것이 충만합니다'하고 답했지요." 남아공으로 '귀국'을 준비하는 김 선교사가 해맑게 다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