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내가 세환이에게 농을 건다. "너처럼 쉽게 연예계 진출한 사람도 드물 거라고." 맞다. 처음으로 서울 시민회관에 그를 데려간 후 첫 라디오 방송 출연부터 첫 앨범까지 모두 탄탄대로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 모두 내가 있었다.
첫 라디오 데뷔는 이종환 DJ가 진행하던 MBC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였다.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심야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시민회관에서 우리가 노래 부르는 모습을 지켜봤던 이씨가 프로그램에 초청했다. 그 자리에서 역시 같은 노래, 비지스의 '돈 포겟 투 리멤버(Don't forget to remember)'를 불렀다.
인기가 많았다. 사람들은 엽서 신청곡에 비지스의 노래 대신 우리가 부른 버전을 더 많이 신청했다. 나와 김세환의 듀엣에는 송창식과 함께했던 트윈폴리오와는 다른 매력이 있었다. 트윈폴리오는 이질적인 두 목소리의 만남이었다. 반면 나와 김세환의 목소리는 미성으로 서로 비슷했다. 당시 듀엣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졌던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and Garfunkel)'이나 '에벌리 브라더스(the Everly Brothers)'에 가까운 조합이었다. 그래서 외려 트윈폴리오보다 더 편안하고 잘 어울린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았다. 게다가 김세환은 어릴 적부터 팝송을 즐겨 들었다. 둘이 함께 부를 수 있는 팝송이 200여 곡이었다.
이 인기를 토대로 김세환은 첫 앨범을 냈다. '별밤에 부치는 노래 씨리즈 V. 3'이다. 판(LP) 앞면에 '라라라'를 포함해 내가 부른 곡을, 뒷면엔 김세환이 '돈 포겟 투 리멤버'를 번안해 부른 '잊지 못할 사랑'을 실었다. 사실상 내가 기획한 앨범이었다. 그가 부를 노래를 선곡하고 가사를 번안하는 일을 내가 맡았고 편곡과 화음도 내가 해줬다. 기타는 이장희와 친했던 강근식이 쳤다.
첫 앨범 발매 이후 그의 인기는 수직 상승했다. 그리고 한 번 오른 인기는 70년대 초반 식을 줄을 몰랐다. 나는 상복이 없었다. 1980년 '바보'로 MBC '금주의 가요'에 5주간 1위를 한 기록 말고는 특별한 게 없다. 반면 김세환은 연달아 상을 타기 시작했다. 앨범을 발매한 이듬해 TBC 신인상을 받았고, 74년과 75년엔 TBC 가수왕 자리에 올랐다. 75년에 송창식이 MBC에서 가수왕 자리에 올랐으니, 그해는 가히 통기타의 해였다.
나를 비롯, 송창식과 이장희도 그를 도왔다. 나는 '길가에 앉아서' '화가 났을까'를, 송창식은 '사랑하는 마음'을, 이장희는 '비'와 '좋은 걸 어떡해'를 그에게 건넸다. 아무런 사심 없이 준 곡들이 줄줄이 히트를 쳤다.
영화에도 출연하기 시작했다. 본래 김세환은 멋쟁이다. 미국에서 직접 공수해온 청바지와 청조끼를 입고 다녔다. 게다가 아버지가 유명한 연극인 김동원이었으니, 그에겐 연기자의 피가 흘렀다.
그래서일까. 세시봉 출신 가수 중 가장 영화 흥행 성적이 좋은 이도 김세환이다. 71년 신성일 감독이 연출한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에 출연했다. 13만 명이 넘는 관객이 들며 흥행에 성공, 그해 신성일은 이 작품으로 백상예술대상 연출상을 받았다. 74년엔 청춘 영화 '맹물로 가는 자동차'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75년엔 나도 같이 영화를 찍었다. 신상옥 감독의 '아이 러브 마마'란 영화였다. 당시로써는 엄청난 제작비인 8000만원을 들인 본격 뮤지컬 영화였다. 신중현씨가 음악감독을, 한익평씨가 안무를 맡았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세 자매가 어머니의 새 신랑감을 구해주는 내용이었다. 세 자매의 짝 역할을 나와 박상규, 김세환이 맡았다.
처음 영화에 출연하게 된 나는 스스로 끼가 있다고 생각했다. 춤까지 배워가며 열심히 찍었다. 이전까지 나에게 한 번도 선배 노릇 해본 적 없는 김세환은 신이 나서 내 연기를 가르쳤다. 그러나 영화는 흥행에 참패했다. 2만 명 정도의 관객만 들고 일주일 만에 막을 내렸다. 그 바람에 내가 영화에 출연했다고 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연기가 어렵다는 걸. 한편으론 다행스럽게도 생각했다. 연기에 끼가 없다는 걸 그때 확실히 알게 됐으니까. 그 실패가 없었다면, 어중간한 연기자로 활동했을지도 몰랐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