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세계육상선수권 현장에선 매일 몇편의 드라마가 탄생한다. 피부도, 얼굴 생김새도 각양각색인 202개국 선수 1945명이 하나씩 써내려가는 인간 드라마다. 키라니 제임스(19)라는 청년이 대구 세계육상선수권 남자 400m 금메달을 따내는 순간 진도(珍島)보다 작은 인구 10만명의 섬나라 그레나다는 축제 분위기로 떠들썩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 우사인 볼트(자메이카)의 '100m 실격'은 그 어떤 드라마보다도 극적인 반전이었다. 볼트가 빠져나간 트랙에선 요한 블레이크(자메이카)라는 새로운 스타가 등극했다.
육상은 인간의 삶에서 떼려야 뗄 수가 없다. 원시시대의 인간은 먹잇감을 뒤쫓기 위해 달리고(트랙), 개울을 건너고(도약), 돌이나 창(투척)을 날렸다. 근대 이후엔 타인과 경쟁하고 자기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는 스포츠로서의 육상을 즐겼다. 47개 종목 하나하나에서 인간의 생존 본능과 희로애락을 맛볼 수 있기에 육상은 재미있다.
◆1945가지 인간 드라마
여자 7종경기 이틀째 경기가 열린 지난달 30일. 7개 종목의 마지막인 800m 달리기를 끝낸 선수 16명은 손을 맞잡고 트랙을 맨발로 돌았다. 이틀간의 '죽음의 레이스'에서 살아남은 서로를 격려하는 '퍼포먼스'였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이들의 우정에 관중들은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카리브해의 이름도 생소한 세인트 키츠 네비스의 국기를 달고 나온 킴 콜린스. 단거리 선수로는 환갑이라는 35세의 나이에 남자 100m에서 동메달을 따는 '투혼'을 발휘했다.
남태평양의 작은 섬 미국령 사모아에서 온 소게라우 투발루(17). 지난달 27일 남자 100m 자격예선에서 15초66로 전체 꼴찌를 했다. 정강이뼈 없이 태어난 피스토리우스(남아공)가 의족을 달고 트랙을 질주하고, 앞을 거의 볼 수 없는 제이슨 스미스(아일랜드)가 비장애인과 당당히 대결했다. 몸뚱이 하나만 있으면 누구나 주연(主演)이 될 수 있는 감동의 드라마다.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육상 선수들의 몸은 예술 그 자체
한국 육상계의 원로인 박정기 IAAF(국제육상연맹) 집행이사는 "육상 선수들의 동작에 감춰진 아름다움이야말로 육상의 진수"라고 했다. 볼트, 블레이크, 카멜리타 지터(미국) 등 폭발적인 스피드를 내는 스프린터의 몸은 근육 덩어리다.
도약 종목 선수들의 동작은 예술 그 자체다. 늘씬한 몸매와 탄탄한 복근을 갖춘 미녀 선수들의 동작 하나하나가 관중들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멀리뛰기의 다리아 클리시나(러시아)가 7m 가까이 뛰고, 높이뛰기의 블랑카 블라시치(크로아티아)가 사슴처럼 가볍게 달리다 2m 높이의 바를 타고 넘는 모습에 관중들은 탄성을 쏟아냈다. 육상 경기를 처음 현장에서 봤다는 장기준(31)씨는 "선수들이 몸에 군살 하나 없으면서도 힘이 넘쳐 보였다"고 말했다.
◆'룰'을 지키는 문명인들의 경쟁
볼트(자메이카)가 남자 100m 결선에서 실격한 뒤, 엄격한 규정을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다. 하지만 세바스찬 코 2012 런던올림픽 조직위원장은 "유명 선수가 탈락했다고 규정을 바꿔선 안 된다. 이것은 원칙의 문제"라고 했다.
남자 110m 허들 결선에서 1위로 골인한 다이론 로블레스(쿠바)가 레이스 도중 류샹(중국)의 진로를 방해했다는 이유로 실격당했다. 로블레스의 방해가 없었더라면 우승할 수도 있었던 류샹은 "경기는 경기일 뿐"이라며 은메달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육상은 초원을 내달리는 맹수들의 속도 경쟁이 아니라 룰(Rule)을 지키는 문명인들의 스포츠다.
◆감동 스토리는 계속된다
라이벌전은 육상의 또 다른 묘미다. 2일 열리는 여자 200m도 그중의 하나다. 세계선수권 4연패(連覇)에 도전하는 앨리슨 펠릭스(26·미국)와 2004·2008 올림픽 챔피언 베로니카 캠벨 브라운(29·자메이카)의 맞대결은 놓칠 수 없는 승부다.
4일 열리는 남녀 400m 계주는 이변이 속출하기에 더욱 재미난 경기다. 100m를 10초 안팎에 달리는 도중 바통을 주고받으려면 한 치 오차도 없는 호흡이 필요하다. 특히 남자 계주는 대회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피날레 경기다.
한국 선수들의 도전도 계속된다. 한국선수 중 유일하게 결선에 오른 김덕현(26)은 2일 남자 멀리뛰기에 출전한다. 4일에는 정진혁(21), 김민(21), 황준현(24) 등 젊은 건각들이 남자마라톤에서 상위권 진입을 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