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신문에서 오랜만에 흐뭇한 사진을 봤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여름휴가지에서 책 보따리를 든 채 두 딸을 앞세우고 동네서점을 나오는 장면이었다. 아이들에겐 '앵무새 죽이기' '붉은 망아지' 등 고전급의 소설을 사줬고, 대통령 자신은 신작소설을 골랐다고 한다. 미국 대통령도 골치 아픈 일이 한두가지가 아닐 터이니, 휴가와서까지 딱딱한 책을 읽기보다 가벼운 소설을 잡은 모양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이야 '담대한 희망'같은 베스트셀러의 저자이자 독서광(狂)으로 소문났으니, 서점에 들른 게 특별한 뉴스는 아니다.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도 재임 중 종종 파리 시내 서점순례를 다녔던 애서가(愛書家)로 소문났다. 그러나 현직 대통령이 자녀나 손주를 앞세우고 동네서점에 들르는 모습을 구경한 적이 없는 우리 입장에선 신기하기 짝이 없는 '사건'이다.
몇해 전 세상을 뜬 인사동 고서점 '통문관' 주인 이겸노 옹(翁)은 생전에 이승만 전 대통령이 현직 시절, 서너 차례 자기 책방을 찾았던 얘기를 회고한 적이 있다. 승용차에서 내린 노 대통령은 불쑥 서점에 들어와 서가에 꽂힌 낡은 책들을 뒤적거리다가 "국학(國學) 연구에 도움이 되도록 좋은 책을 많이 발굴하라"는 덕담을 던졌다고 한다. 벌써 반세기 전 일인데, 그 후로 우리 현직 대통령이 동네서점에 들러 책을 샀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없다.
요즘은 온라인 서점이 대세이니 우리 대통령이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해 읽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1년에 100여곳씩 사라진다는 동네서점의 기(氣)도 살릴 겸, 손주들에게 책을 골라주기 위해 책방을 찾는 대통령을 볼 순 없을까. 대졸자 10명 중 4명이 백수(白手) 신세라는 '88만원 세대'도 껴안을 겸, 대통령이 직접 서점에서 요즘 잘 나가는 밀리언셀러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책이나 미국에서도 화제를 부른 신경숙 소설 '엄마를 부탁해'를 뒤적인다면 많은 국민적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은 고도의 정치행위다. 공식연설과 일정뿐 아니라 일과 후나 휴가여행에서도 대통령의 정치적 비전과 국민을 향한 메시지가 전달된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의 대(對)국민 메시지가 전달되는 방식은 한마디로 너무 뻔하다. 회의장에서 딱딱한 얼굴로 각료들을 훈시하는 모습도 재미없지만, 친(親)서민 정책이라는 카드를 꺼낼 때마다 시장상인을 찾아 손을 잡는 1970년대식 '의례'는 감동이 없다.
대통령이 돈 한푼 안 들이고 국민들의 응어리를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일은 많다. 오는 국군의 날에 2002년 월드컵 열기에 묻혔던 제2연평해전 순국용사 6명의 가족과 부상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그들의 손을 붙잡고 "정말 고맙다. 여러분 아들과 남편 덕분에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있다"는 말 한마디를 건넨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사함을 느낄까. "쇼 한다"는 비아냥이 부담스러울지도 모르지만 국민을 통합할 사명을 띤 대통령은 이런 장면을 보여주는 것도 의무이다. 내친김에 국민들의 마음을 편안하고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모델 역할 하나쯤을 대통령의 비(非)공식적 임무로 보탤 것을 제안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