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추석 직전 피아니스트 서혜경은 유방암 3기 진단을 받았다. 사실을 알렸을 때 가족들은 믿지 않았다. '집에 오기 싫어 핑계 댄다'고 생각했다.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쳐온 서혜경은 형제들, 또래 친구들과 놀아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피아노 치기에 적합한' 근육과 신경을 잃어야 한다니 억울하고 원통했다. 그건 피아노를 다시는 칠 수 없다는 얘기였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 찾아간 병원에서 드디어 "부분 절제만 하자. 피아노는 다시 칠 수 있을 것"이란 얘기를 들었다. 그렇게 2006년 10월부터 그녀는 여덟 번의 항암치료와 절제수술, 서른세 번의 방사선 치료를 이겨내고 2008년 1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재기에 성공했다. 작년에는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전곡에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까지 수록한 음반(CD 3장)을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냈다.

피아니스트 서혜경은“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덕에 삶에 여유가 생겼다”고 유쾌하게 말했다.

그녀가 또다시 '작은 신화'에 도전한다. 오는 9월 서혜경은 러시아로 날아가 차이콥스키 협주곡 전곡 녹음에 도전한다. 지휘자 알렉산더 드리트리예프가 이끄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믹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7일부터 15일까지 하루 3시간씩 호흡을 맞춘다. 이 오케스트라는 작년 녹음 때도 함께했다. 30일에는 '대전시향과 서혜경이 함께하는 러시아 센티멘탈' 공연을 통해 차이콥스키, 무소륵스키 등 러시아 작곡가의 피아노곡을 들려준다.

18일 만난 서혜경은 시종일관 유쾌하고 활달했다. "15일 한국에 와서 내리 잠만 잤어요. 아프기 전엔 새벽 4시 공항에 내려 청량리에서 602번 버스 타고 학교 가서 밤 9시까지 가르치고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연습해도 멀쩡했는데 지금은 사흘 정도 쉬어줘야 해요."

라흐마니노프 음반 때와 마찬가지로 여성 피아니스트로서 차이콥스키 협주곡 전곡을 녹음하는 건 '세계 최초'다. "라흐마니노프 전곡 녹음을 등반가들이 히말라야 14좌 완등을 하는 것에 비유하는데, 차이콥스키 전곡 녹음은 이 14좌 완등을 다섯 번 반복하는 것과 맞먹어요. 엄청나게 길고 기가 막히게 화려하죠.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이 전체 80쪽인데, 차이콥스키 협주곡 2번은 1악장만 60쪽이고 그 안에 카덴차(기교적이고 화려한 독주)가 3개나 있어요. 연주시간은 50분이나 되죠."

요즘 클래식 음반은 전성기 때 10분의 1 수준인 3000장쯤 팔리면 '성공'이라 할 만큼 불황이다. 이런 상황에 음반 녹음에 그토록 매달리는 이유가 뭘까. "대곡들로 좋은 음반을 남기는 것은 호로비츠나 루빈스타인처럼 세계적 대가의 반열에 오르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에요. 학자라면 누구나 새로운 발견이나 발명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논문을 남기고 싶어하잖아요? 연주자도 청중을 감동시키는 연주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거예요." 음반은 도이치 그라모폰이나 데카에서 발매될 예정이다. 그는 "방대한 스케일 속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디테일을 어떻게 펼쳐야 할지 많이 고민했다"고 덧붙였다.

서혜경은 수술 후에도 '매일 5시간, 한 달 150시간' 연습량을 엄수하고 있다. 서씨가 수술 후의 첫 연습 얘기를 들려줬다. 그녀는 수술을 통해 오른쪽 겨드랑이 밑 임파선을 모두 떼냈다. 의사는 그에게 얼마 동안은 오른손으로 손가방도 쥐지 말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사흘 뒤 링거 주사기를 꽂은 채 병원을 빠져나와 집으로 갔다. 피아노 앞에 앉아 '호프만의 뱃노래'를 쳤다. '파도 물결과 바람 소리까지 세밀하게 묘사한 곡을 칠 수 있을까', 그녀는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손가락은 제대로 돌아갔다. "괜찮다! 칠 수 있다!" 그날 그녀는 피아노 앞에서 목놓아 울었다.

피아노만 치다 병을 얻었는데 또다시 피아노에 매몰되는 삶이 억울하지 않을까. "앞만 보고 달리던 급행열차가 완행열차로 바뀌었어요.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덕에 삶에 여유가 생겼지요. 재발할까봐 겁나지만 인생이 다 그렇잖아요? 꾸역꾸역 살아내서 동양에서 제일 아름다운 음악을 남기고 가는 여자가 될 겁니다." 듣고 있던 매니저가 "하여튼 욕심도 많다"며 혀를 찼다.

미국의 원로 평론가인 해리스 골드스미스는 서혜경의 연주를 듣고 이런 평을 남긴 적이 있다. "천재는 많은데, 천재가 대가가 되기는 쉽지 않다. 서혜경은 천재에서 대가로 가는 그 모든 과정을 다 겪었음을 피아노 소리로 천하에 알리고 있다."

▶대전시향과 서혜경이 함께하는 러시아 센티멘탈=30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042)610-22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