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하씨

"디자인은 '미운 오리 새끼' 동화 같아요. '오리는 이렇게 생겼다'는 기준으로 백조 새끼를 보면 크고 못생겼죠. 하지만 나중엔 결국 우아한 백조가 되잖아요? 물건도 마찬가지예요. '시계는 이렇게 생겼다'는 고정관념이 있어요. 여기서 벗어나면 처음엔 어색하지만 그게 또 다른 즐거움을 주기도 해요."

건전지가 바늘이 되는 시계, 플러그 모양 MP3 플레이어…. 산업디자이너 우기하(32)씨의 작품들이다. 우씨는 사물의 익숙한 형태를 살짝 비튼 이 작품들로 올해 '차세대 디자인리더'로 선발됐다. 한국디자인진흥원은 2004년부터 매년 한국을 이끌어갈 대표적인 젊은 디자이너 10여명을 '차세대 디자인리더'로 선정해 지원하고 있다. 22일 서울 상암동 DMC첨단산업센터에서 우씨를 만났다. 그는 "사물의 아키타입(특정한 제품군에 대해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떠올리는 이미지)을 재해석하는 게 내 디자인의 키워드"라고 했다.

우씨는 지난해 1월까지 디자인 회사 '이노디자인'에서 5년 정도 일했다. 휴대전화, 전기밥솥부터 가로등까지 다양한 제품을 디자인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정체(停滯)되고 있다는 느낌이 왔다. "대량생산하는 제품이다 보니 평균을 좇아가게 되더라고요. '소비자 디자인 선호도 조사' 같은 자료가 나오면 그걸 따라가는 거죠. 디자인을 의뢰한 회사의 요구도 무시 못 해요. 디자이너가 창의성을 실험하기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계 도시의 시차를 한 번에 표현한 시계‘벤트 핸즈(Bent Hands)’. 테두리의 긴 눈금은 시(時), 짧은 눈금은 한 칸이 10분이다. 같은 칸에 있는 두 도시는 12시간 차이가 나기 때문에 낮밤만 다르고 그 칸의 시각을 나타내는 파란 점의 위치는 같다. 예를 들어 사진에서 런던이 0시 25분일 때 이보다 9시간 빠른 서울은 오전 9시 25분이다. 서울보다 12시간이 늦은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전날 오후 9시 25분. 시간의 흐름에 따라 파란 바늘이 있는 원판 전체가 돌아간다.

퇴사한 뒤엔 유학을 준비했다. 학원에 다니며 영어공부를 하는 동안 디자인 작업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는 "매일 하던 일을 서너 달 쉬고 나니 '내가 전에 디자인을 하긴 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생산성보다 아이디어의 표현에 중점을 둔 '내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세계 여러 도시의 시간을 한눈에 보이게 만든 시계, 자 없이 곧은 직선을 그을 수 있게 한 필기 보조구 등을 이렇게 만들었다. 독특한 모양으로 시선을 끌기보다는 작은 발상의 전환으로 형태를 새롭게 재구성하거나 편리함을 추구한 제품들이다.

우씨는 "회사를 나와 내 작품을 만들면서 디자인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달라졌다"고 했다. 전에는 제품의 형태에 대해 고민했다면 이제는 제품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메모판과 일체화시킨 전화기 '폰 온 보드(Phone on Board)'는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행동을 세심히 관찰해 만들어낸 대표적 작품이다. "식구들이 전화하는 모습을 가만히 봤어요. 수화기를 들고 메모지 찾느라 바쁘더라고요. 아예 전화기에 메모할 수 있게 하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모양이 특이한 것을 만들려고 접근하면 새로운 디자인을 이끌어내는 데 한계가 있어요."

(사진 위)자 없이 직선을 그을 수 있는 필기 보조구. 바퀴의 회전수에 따라 선의 길 이가 액정에 표시된다. (사진 가운데·아래)플러그 모양 MP3는 콘센트에 바로 꽂아 충전할 수 있다.

'양코 디자인' 같은 해외 디자인 전문사이트에 소개된 이 작품을 보고 영화 '맨 인 블랙3'의 제작진에서 소품으로 사용하고 싶다는 뜻을 밝혀오기도 했다. 그는 "비용문제에 대한 의견이 맞지 않아 최종 채택되진 못했지만 해외에서도 긍정적 반응이 오는 것을 보며 자신감을 얻었다"고 했다.

우씨는 "저개발 국가의 생활 문제를 해결하는 디자인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물통을 들고 먼 거리를 걷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해 쉽게 끌 수 있도록 만든 물통 '큐 드럼'을 예로 들었다. 그는 "생활 문제를 해결하려면 낯선 곳에 가서 그 사람들의 삶을 면밀히 관찰하고 문제와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한다"며 "어려운 사람들을 돕자는 도덕적인 시도이자 관찰과 발상의 전환을 중시하는 디자이너로서의 도전"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