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12월 11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일본산 ‘기린맥주’광고. 맥주를‘연말연시 선물로 주고받기 최적”이라 광고 하고 있다.

막걸리와 청주를 주로 마시던 이 땅의 주당(酒黨)들에게 근대 들어 신천지가 펼쳐진다. 맥주와 포도주, 그리고 위스키가 들어온 것이다. 이 중에서도 '모던뽀이'의 상징 같았던 근대의 술이 맥주였다. 알코올 도수가 낮아 일제하 금주운동의 화살을 덜 맞을 수 있었던 것도 보급에 한몫하지 않았나 여겨진다. 맥주를 좋아하는 주당들은 '삐-루당'(beer黨)이라 불렸다.(조선일보 1932년 2월 15일자)

이 땅에 맥주공장이 생기기도 전부터 일본산 수입 맥주의 소비량은 해가 갈수록 급증했다. 1923년 한 해 동안 소비된 맥주가 약 112만8000병인데(1924년 5월 7일자), 5년 뒤인 1928년엔 한 해 오십팔만타(打·다스) 즉 696만병으로 급증했다.(1929년 7월 21일자)

초창기의 수입 맥주란 값비싼 술이었다. 1924년 5월 7일자 기사의 맥주 판매량과 가격을 통해 환산하면 한 병당 오늘의 화폐 단위로 약 7500원. 요즘보다 3배 이상 비싸다. 그래서인지 1930년 연말 조선일보에 게재된 기린맥주 광고는 병맥주 그림을 싣고는 "연말연시에 주고받을 선물로 최적"이라고 카피를 썼다.(1930년 12월 11일자) 막걸리가 서민적 술이라면 맥주는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 있는 계층이 주로 음식점이나 술집 등 집 바깥에서 마시는 술이었다. 간혹 집에서 손님에게 대접할 때 잘 모르는 주부들은 청주처럼 따끈하게 데워서 내기도 했다고 한다.

1928년의 맥주 소비량(696만병)은 당시 인구를 2000만으로 잡으면 3명당 일 년에 한 병꼴로 마신 셈이니, 오늘의 기준으로는 아주 적은 양이다. 하지만 상당수 동포가 가난에 허덕이던 식민지였기에 당시 조선일보는 비싼 맥주 소비의 증가에 대해서는 비판의 화살을 계속 쏘았다. "1923년 맥주 소비에 들어간 돈이 42만3000원(약 84억6000만원)"임을 보도한 1924년 5월 7일자 기사엔 "목 말은데 목 취기는 돈이 이가치 만히 들어가는뎨 모두 일본 물건"이란 제목을 길게 붙여 긴 탄식을 담았다.

뿐만 아니라 맥주가 건강에 해롭다는 기사도 자주 썼다. "맥주는 '에넬기'(에너지)가 강함으로 항상 애용하게 되면…심장에 고장을 일으키게"된다는 내용을 '과음하면 생명에 위험'이란 제목으로 보도했고(1931년 10월 8일자), "맥주를 늘 계속해서 먹으면…살이 쩌도 이만저만 찌는게 아닙니다"라고 경고했다.(1936년 8월 27일자)

일제하 금주 운동가들은 "술은 우리 인간을 사멸화하는 악마이다!"라며 "절대 불음(不飮)하기를 맹서하자"고 결의(1926년 1월 3일자)했지만 맥주 소비는 계속 늘어났다. 1933년에는 영등포에 대일본맥주주식회사가 '조선맥주'를, 일본 기린맥주주식회사가 '소화기린맥주'를 설립했다. 국내 생산이 개시되면서 1933년 맥주 소비량은 "육백이십칠만 리틀(1병 500mL로 환산하면 1254만병)"로 격증했다.(1934년 6월10일자) '술 권하는 사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