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세 처녀 공작원의 임무 - "남조선 비행기를 제끼라" 74세 공작원과 일본인 父女 행세
기내서 우리말 들려 동요했지만 통일위해 희생한다고 생각

"내 실물을 처음 보는 사람마다 '처녀 땐 통통했는데'라고 말한다. TV 화면에서 실물보다 크게 보여진 탓도 있을 것이다. 세월이 많이 흐르긴 했지만…."

안기부에서 보호받고 있을 때 그녀에게 권총 사격을 시키면 백발백중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공작원 때는 남자 한둘은 상대할 수 있는 격술(擊術) 실력은 됐다"고 말했다. 그녀는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앉았다. 이제 24년 전 바그다드 공항으로 돌아갈 때가 됐다.

법정에 들어서는 김현희.

―폭파 목적으로 KAL 858편에 탑승했다. 그때 당신의 감정 상태를 기억하나?

"평양 동북리 초대소에서 '남조선 비행기를 제끼는 것'이라는 임무를 받았다.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남조선 괴뢰의 두 개 조선 책동을 막고 적들에게 큰 타격을 주라. 적후(敵後·적의 배후)에서 임무를 수행해내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하지만 그때 당신은 25세 처녀였다.

"공작원으로서도 첫 임무였다."

―그런데도?

"…사실 김승일 할아버지(공작 파트너·당시 74세 추정)가 강심제를 줬다. 비행기에 올라타니 한국말로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했다. 공작원 훈련을 7년8개월 받았지만, 그때 처음 남조선 사람을 봤다. 우리 정체가 탄로 날까 봐 조마조마했다."

―비행기 안에는 우리나라 중동 근로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다는….

"북한에서 연구할 때 외국인이 타지 않는 항공편을 노렸다. 국제 문제가 안 되도록."

―3년 만에 귀국하는 이들이 우리말로 얘기하는 걸 들었나?

"좌석 뒷줄에서 세 번째에 앉았다. 옆자리에는 서양인이 앉았다. 눈을 감고 있으니 우리말이 들렸다. 회사 얘기를 하는 것 같기도 했고. 저녁 식사를 마치자 다들 잠들었다. 약간의 동요가 있었지만, 중앙당에서 어련히 알아서 이 임무를 줬겠나 했다. 통일을 위해선 희생돼야 한다는 혁명가로서의 결의를 다졌다."

―그때까지 당신이 알고 있는 바깥세상 정보는?

"세상을 아는 것보다, 북한이 가르친 대로 따르는 로봇이었다. 물론 해외실습도 했다. 바깥세상이 북한보다 풍요롭고 자유로웠다. 하지만 남한이 늘 공격하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럴 수밖에 없다고 배웠다. 북한이 어렵고 못살아도 다른 마음을 가질 수 없었다. 용납되지 않았다."

―KAL기 폭파 지령을 받고 김정일을 만난 적 있나?

"없다. 임무를 받고서 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납치·테러·해외첩보 임무) 이용혁 부장을 초대소에서 만난 적이 있다."

―왜 김정일의 직접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나?

"북한은 김정일의 직접 지시 없이는 총 한 방도 쏠 수 없는 나라다. 한 달 동안 공작 코스를 정할 때, 할아버지(김승일)가 바그다드 노선이 부당하다고 했다. '전시국가를 지나기 때문에 검색이 까다로울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때 대외정보조사부 과장이 '이미 비준이 난 거니까 이번에 그냥 하라'고 했다. 북에서는 김일성·김정일이 아니면 비준을 할 사람이 없다. 대남부서는 김정일이 책임지고 있었다."

김현희씨는 “공항 검색요원이 시한폭탄 배터리를 빼냈을 때 임무 수행이 틀렸구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1987년 11월 12일 오전 8시 30분, 그녀는 김승일과 함께 평양 순안 비행장을 출발했다. 출발 직전에 "우리는 적후(敵後)에서 생활하는 동안 3대 혁명규율을 잘 지키고… 생명의 마지막까지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높은 권위와 위신을 백방으로 지켜 싸우겠다"고 선서했다.

그녀 일행은 그날 밤 모스크바에 도착한 뒤 곧바로 부다페스트(헝가리)로 날아갔다. 거기서 육로로 (오스트리아)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일본인 부녀로 위장해 위조 일본 여권을 사용했다. 그녀는 코트, 스웨터, 구두, 손목시계, 손가방 등 일제상품 위주로 쇼핑했다. 두 공작원에게 주어진 공작비는 1만달러였다. 이들은 오스트리아에서 다시 항공편으로 베오그라드(유고슬라비아)로 갔다. 여기서 함께 따라온 공작지도원으로부터 폭약이 장착된 일제 파나소닉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액체 폭약을 건네받았다. 이라크 항공편으로 바그다드에 들어간 날은 11월 28일이었다.

―왜 이렇게 동선(動線)이 길었나?

"신분 위장을 위해서였다. KAL 858편을 타기 위해 할아버지가 연구를 많이 했다."

―파나소닉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한뼘 크기였던 것으로 아는데.

"그렇다. 스위치 작동 9시간 뒤 폭발한다. 전지약(배터리)이 특수제작된 것이었다. 절반은 폭약, 절반은 라디오를 틀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다른 걸로 대체할 수 없는 배터리였다."

이들이 바그다드 공항 보안검색대를 통과할 때, 검색요원이 "배터리를 갖고 비행기를 탈 수 없다"며 라디오에서 배터리 4개를 빼내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KAL기 폭파가 무산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해외를 들락날락했지만 그런 적이 없었다. 소지품을 다 꺼내게 하는 등 검색이 심했다. 아랍 국가에 대한 정보가 없었던 탓이다. 어찌할 줄 몰라 할아버지 쪽을 쳐다봤다. 할아버지가 태연하게 배터리를 주워 끼운 뒤 라디오를 틀었다. '그냥 라디오인데 승객에게 이래도 되느냐'고 항의했다. 그렇게 통과했다."

―만약 거기서 실패했다면?

"계획 담당자들은 문책당하고…. 발각 난 것은 아니었으니 나는 다시 나왔을지 모른다."

이들은 좌석 위 선반에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액체 폭탄을 담은 쇼핑백을 둔 채 중간기착지 아부다비(아랍에미리트)에서 내렸다.

KAL기가 폭파할 경우 아부다비에서 내린 탑승자 15명이 추적 대상이 된다. 그녀 일행은 '흔적'을 지워야 했다. 로마행 비행기로 갈아타는 '도주용' 티켓을 따로 준비해뒀다. 그 티켓은 통과비자 문제에 걸렸다. 어쩔 수 없이 타고 온 항공권에 찍힌 대로 바레인행(行)을 타야 할 운명이었다.

다음 날 아침 바레인 비행기를 탈 때까지 통과여객 대합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미얀마 근해 상공에서 KAL기는 폭파됐다.

―대합실에서 KAL기가 언제 터질지 시간을 계산했나?

"제대로 폭파가 됐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는 우리의 탈출로가 막혀버려 그게 피를 말렸다. 우리에게 수사를 좁혀올 텐데, 대합실에서 빠져나올 수 없고…."

―당신은 115명이 죽는 폭파 장면을 보지 못했다. 이 때문에 자신의 범죄에 대해 죄책감이 덜한 것 아닌가?

"당시에는 죄책감이란 게 없었다. 그런 생각을 했으면 혁명가가 아니고, 북한 공작원이 아니다. 뒷날 유족들과 대면하기 전까지는 몰랐다. 재판정에서 '네가 했을 리 없다. 왜 안 했다고 말하지 않느냐'는 유족의 절규에 정말 안타깝고 죄스러운 마음이었다. 빨리 죽여달라는 생각만 했다. 죽는 것이 쉽고 살아 있는 게 고통이었다. 내가 살아남을 줄은 생각을 못했다."

바레인 공항서 체포 - 입국카드에 신이치·마유미… 姓 대신 이름만 써 꼬투리 잡혀
김승일, 공항 가는 길에 '혹시 모르니' 하며 독약앰풀 건네


토요일 오후, 이들은 바레인에 내려 호텔에 투숙했다. 이슬람권에서는 일요일이 공휴일이 아니어서 여행사가 문을 연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이틀 밤을 묵었다.

"아랍 국가에 대한 기본 정보가 전혀 없었다. 공작 자금 때문에 책상머리에서만 작전을 짰기 때문이다."

이들에 대한 추적이 시작됐다. 바레인 입국카드 명단에 '신이치' '마유미'라고 적힌 게 단서였다. 일본인이라면 '하치야 신이치'와 '하치야 마유미'로, 혹은 '하치야'란 성(姓)만 쓴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쓰라고 했다. 신원이 완전히 안 드러나도록 나름대로 계산한 것이었다. 그게 꼬투리가 될 줄 몰랐다. 할아버지 여권은 진짜 일본인을 도용해 문건상 위조가 아니었다. 내 여권 번호는 남자에게 쓰는 번호였다. 하지만 그때까지 유럽을 다녀도 적발된 적은 없었다."

―그날 밤 한국대사관 직원이 호텔로 당신을 찾아오지 않았나?

"포위망이 좁혀 들어오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모른 척 누워 있었고, 할아버지와 필담을 나눈 뒤 돌아갔다."

―그 직원이 돌아간 뒤 어떤 말을 나눴나?

"할아버지가 '폭발한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증거가 없으니 우리를 체포할 수 없다'고 했다. 다음 날 아침 공항으로 가면서 '태연하게 행동하라. 비행기를 타면 끝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혹시 모르니…'하며 말보로 담배(독약 앰풀)를 줬다."

"대학 2학년 때 공작원 뽑혀… 춘향이 역 맡는 줄 알아"

김현희씨는 어렸을 때는 영화배우, 좀 더 자라서는 외교관이 꿈이었다. 그런 그녀가 평양외국어대 일본어과 2학년 재학 중인 1980년(18세 때) 공작원으로 뽑혔다.

"문건을 검토하고 학교에 와서는 나에 대해 요해(了解·파악)한 뒤, 중앙당 간부가 세 차례 면담했다. 아버지는 외교관(당시 앙골라 주재 대사관 근무)이라 출신 성분이 좋았다. 나도 모범생이었고, 일본에 침투시키려는 목적이어서 일본어를 한 내가 합당했던 것 같다."

―그때 '공작원'을 뽑는 심사인 줄 알았나?

"뽑힐 때는 몰랐다. 당시 '춘향이 영화를 찍는다'는 말이 퍼져 있어, 춘향이 역을 맡는 줄 알았다. 김정일이 많이 관심을 가진 영화였다. 선발 심사가 끝난 뒤, 중앙당 간부가 승용차로 집까지 데려다 주며 '옷가지를 챙겨 트렁크에 담아라. 오늘 쉬고 내일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내가 어떻게 될지 부모님도 정확히 몰랐다."

―하지만 뽑혔을 때 선택된 사람이라는 느낌이 있었나?

"중앙당은 힘 있는 데다, 신 같은 존재인 김일성을 가장 가까이 모시는 곳이다. 거기에 뽑혔으니 영광으로 생각했고 들떠 있었다. 부모님을 떠난다는 슬픔은 없었다. 아직 어렸으니까."

―자신이 무엇을 하게 될지를 언제 알았나?

"처음 묘향산 지구에 있는 '금성정치군사대학'에 들어갔을 때다. 여기서 밀봉(密封) 교육을 받았다. 통일을 위해 일한다는 혁명가의 긍지를 배웠고, 통일 혁명을 하다가 실패한 사례 분석, 정보수집, 포섭, 행군, 격술, 사격 훈련, 비트에 은신하는 법 등을 배웠다. 그 뒤로 남한화 교육, 일본인화 교육, 중국인화 교육, 해외실습까지 7년8개월 공작원 교육을 받았다."

―왜 공작조를 2명으로 편성하나?

"혼자는 안 보낸다. 서로 보완하는 면도 있지만, 감시하는 역할도 한다."

―김승일과 일본인 부녀로 위장했다.

"할아버지는 6·25때부터 그 부서에서 일해왔다고 들었다. 병약한 노인과 막내딸이 함께 여행하면 의심받지 않았다. 실제 약을 챙겨주곤 했다. 힘에 겨워 '쉬어가자'는 말을 자주 했다. 1984년에도 같이 해외여행을 한 적이 있다. 그때 할아버지는 남한에 사업 연계를 위해 잠시 들어갔다 나왔다. 한조(組)가 된 것은 그의 경험을 내게 인계하는 면도 있었다."

―김승일과는 서로 대화를 많이 나누었나?

"공작원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서로 물어서도 안 된다. 자기 본명도 안 밝힌다. 나를 '마유미'로 불렀다. 서로 일본어로 대화했다. 물론 오래 같이 있다 보면 상대에 대해 조금은 알 수 있다. 수사받을 때 내놓은 자료가 그렇게 얻은 것이다."

―김승일은 어떤 사람이었나?

"온순하고, 책 읽기를 좋아하고 연구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런 양반이 공작원이 됐나?

"성격과는 상관없지 않은가."

김승일은 바레인 공항에서 정체가 탄로 나 독약 앰풀을 깨물고 숨졌다. 시신은 국내로 송환돼 부검처리됐다. 체중이 45kg도 채 안 됐다고 한다.

["북한 사람은 절대 사과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