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웅 문화부 차장

문학애호가이자 자전거 레이서인 LS전선 구자열(具滋烈·58) 회장에게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미조하타 히로시(溝畑宏·50) 일본 관광청 장관이 얼마 전 일본 땅에서 우리나라 애국가를 목청껏 불렀다는 얘기였다. 사연은 이렇다.

지난달 17일 일본 혼슈 남서부 돗토리현에서 전(全)일본 트라이애슬론 대회가 열렸다. 트라이애슬론은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철인(鐵人) 3종 경기이다. 수영과 도로사이클, 마라톤을 쉬지 않고 잇는 극한 스포츠다. 돗토리현이 대회 사상 처음으로 한국인을 초청했고, 대한사이클연맹 회장인 구 회장의 지원으로 한국선수 10명이 참가했다. 일본축구 J리그 오이타팀의 전직 사장이자 만능스포츠맨인 미조하타 장관도 대회 격려도 할 겸, 일부 종목에 참가도 할 겸 참석했다고 한다.

드라마가 펼쳐진 것은 해가 진 후였다. 사위가 칠흑 같던 저녁 9시 8분. 선수 대부분이 경기장을 이미 나선 가운데, 한국인 김수녕(36) 선수가 결승선을 통과했다. 완주 기록은 14시간 8분 3초. 584명째였다. 선수 본인은 물론이지만, 미조하타 장관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14시간 30분을 넘어서면 대회 스태프조차 철수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김 선수의 사투(死鬪)에 감격해 애국가를 한국어로 부르기 시작했다. 같이 있던 한국선수들이 깜짝 놀라며 함께 따라 불렀다. 이날의 드라마는 지역신문 1면에 소개됐고, 돗토리현은 감사의 편지와 함께 관련기사가 난 신문을 구 회장에게 보내왔다. 이 신문은 "일본 관광청 장관이 김씨의 골인을 기다려 한국선수단과 한국국가(國歌)를 합창한 장면은 이번 대회를 상징하고 있다"면서 한일간의 우의와 친선을 강조했다.

구 회장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미조하타 장관은 그동안 76회나 한국을 방문한 지한파(知韓派), 아니 애한파(愛韓派)다. 일본정부 관광국 서울사무소에 물어보니 그는 한국 노래와 드라마의 열혈 팬인 데다, 한국 애국가를 4절까지 암송한다고 했다. 일본인 입장에서는 자기 나라 장관의 이런 튀는 행동에 불편해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란다. 미조하타 장관은 지난 4월에도 한국을 방문해 동일본 대지진에 대한 한국의 위로와 격려에 감사를 표했다.

지난주 존재감이 희박한 일본 극우파 의원 몇 명이 김포공항에서 '농성 해프닝'을 벌이고 돌아갔다. 사실 호들갑을 떨 일도 아니었다. 독도 관련 사안마다 교묘한 자극을 통해 한국 스스로 소란을 떨게 만드는 게 그들의 오랜 전술이 아니었던가. 중요한 건 균형이다. 공항에서 강짜를 부리며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천격(賤格)의 의원들에게는 그에 맞는 냉소를, 한국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며 한국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는 장관에게는 그에 걸맞은 우정을 보이면 되는 것이 아닐까.

한국의 작가 신경숙과 일본의 소설가 쓰시마 유코가 서로에게 보낸 편지를 묶어 서간집 '산이 있는 집, 우물이 있는 집'을 낸 일이 있다. 쓰시마 유코는 '인간 실격'으로 유명한 일본의 천재작가 다자이 오사무(1909∼1948년)의 딸이다. 국경을 넘어선 작가들의 우정이다. 싸우기만 하면서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