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투황제'로 일컬어지던 에밀리아넨코 표도르 신화가 무참히 짓밟혔다.
표도르는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일리노이주 시카고의 시어스 센터에서 열린 스트라이크포스 메인이벤트전에서 미국의 강자 댄 헨더슨에게 참패를 당하고 물러났다.
초반부터 주먹으로 막 돌진하던 표도르는 펀치가 몇 차례 적중하는가 싶더니 헨더슨 특유의 맞타격에 턱이 걸리며 이내 주춤하고 말았다.
이후 레슬링 공방에서는 상반신이 완전히 봉쇄당한 채 헨더슨의 연신 계속된 니킥에 왼쪽다리가 큰 대미지를 입으며 절뚝거리기 시작했다.
스피드가 뚝 떨어진 표도르는 잠시 숨을 고른 뒤 펀치 난타전을 벌이기도 잠시 쓰러진 헨더슨에 파운딩을 퍼붓다 기가 막힌 움직임으로 하위포지션을 빠져나온 헨더슨에 뒤를 잡히며 뒤쪽에서 날아든 훅 한방에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표도르는 심판이 너무 성급하게 경기를 종료시킨 게 아닌가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펀치에 턱을 가격당하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던 모습에서 더 이상 과거 격투황제의 위용을 찾아볼 수 없었다.
헨더슨은 1970년생이다. 1976년생의 표도르보다 무려 6살이 더 많고 체격에서도 표도르보다 한참이 작다.
나이가 많아서라든지 요즘 격투기에서 강조되는 피지컬이 달려서 졌다는 등의 변명은 통하지 않게 된 그야말로 완벽한 참패였다.
표도르의 패배는 크게 3가지 요인으로 분석될 수 있다. 첫째 상대를 너무 얕잡아봤고 둘째 옛날식 싸움을 고집했다. 셋째 선수들이 이제는 표도르라는 이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위에 세 가지는 복합적으로 연계돼 있다. 표도르는 공이 울림과 동시에 막 달려들다 중심을 낮게 잡고 딱 버티며 맞받아치는 헨더슨에게 사실상의 카운트펀치를 허용했다.
과거 프라이드 시절에는 자신의 발밑에도 못 미치던 헨더슨을 얕잡아보다 제대로 한방이 걸린 셈이다. 늙고 작은 헨더슨 정도는 펀치 몇 번으로 쉽게 끝낼 수 있을 거라고 본 판단의 미스였다.
헨더슨은 투지에 관한 한 둘째가라면 서러운 파이터다. 이 점을 간과했다. 표도르의 이름값에도 전혀 주눅 들거나 물러서지 않고 정면으로 맞받아쳤다.
마지막 한방이 들어간 장면에서는 표도르가 얼마나 현대식 격투기와 동떨어져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표도르는 10년 전과 똑같았다. 쓰러진 헨더슨에게 크게 휘두르는 전매특허의 파운딩펀치를 내리꽂으려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밑을 돌아서 빠져나와 뒤쪽에서 전광석화같이 훅을 집어넣은 헨더슨의 한방에 순간 실신해버렸다.
과거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술이 눈 깜짝할 사이에 펼쳐진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었다.
나이 41살에도 자신보다 20살이나 어린 선수들과 어울려 현대식 기술과 전략들을 끊임없이 익히고 연구한 헨더슨의 피나는 노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반면 표도르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이 자신의 본능에만 의존하는 경기운영 방식을 고수했다. 이미 파헤법이 다 나온 전략이나 기술들은 헨더슨에게 먹혀들 리 없었다.
10년 전 휴대폰이 연식은 더 오래됐을지 몰라도 스마트폰으로 빠르게 진화한 통신장비를 이길 수 없는 논리나 마찬가지다.
표도르는 3연패를 당했다. 그래도 팬들은 표도르가 계속 현역으로 남아주길 바란다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이대로는 곤란하다. 과거에 안주해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황제라면 연전연패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헨더슨이 보여줬듯 이제 그 어떤 파이터도 표도르의 명성에 주눅 들지 않는다. 치고 들어오면 당당하게 맞받아친다. 게다가 요즘은 막강화력을 내뿜는 거대한 피지컬의 영건 파이터들이 수두룩해졌다.
피지컬도 기술도 전략도 힘도 젊음도 모두 앞서는 파이터들 사이에서 표도르는 한없이 작아진다. 표도르에게 남은 건 동물적인 싸움본능 하나 뿐인 냉정한 현실이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다 뜯어고칠 자신이 없다면 표도르는 이대로 은퇴하는 게 정답일지 모른다.
과거 찬란했던 신화에 계속 오점과 치욕만 남기며 '제2의 크로캅'으로 전락하는 꼴을 팬들은 바라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