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1925년 6월 27일자에 "서울 시내 종로경찰서 관내 인력거군(人力車軍) 오륙백명은 임금인상과 시내에 새로 등장하는 '탁시'에 대한 대책을 토의하기 위한 인력거군 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는 1단짜리 소식이 실렸다. 실제 대회가 열렸는지 여부는 후속 기사가 없어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흘 뒤 6월 30일자에 "시내 '택씨-' 운행 허가를 받은 야야촌(野野村)이 신청한 경성역 구내 택시설치 허가를 불허했다"는 소식이 실렸다. 인력거꾼의 집단 반발에 당국이 일단 후퇴한 것이다.

그러다 1927년을 전후해 경성에 택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영업용 택시의 등장은 곧바로 인력거꾼을 위협했다. 이를 조선일보는 '탁시-에 타격밧는 수천 차부 비경(數千車夫悲境·수천 인력거꾼의 슬픈 처지)'이란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전했다.

경성부가 부영버스의 운행계획을 발표하자 경성부에 몰려가 시위 중인 인력거꾼들. 조선일보 1928년 3월 14일자에 실린 사진.

"…최근의 경성시내에는 각 처에 갑싸고 신속한 '탁시'회사가 생기어, 시내에는 어데를 가던지 '일원균일(一圓均一)'이라는 표어 아래, 날로 그 세력이 번창하여 가는 바, 그에 따라서 제일 타격을 받는 것은 시내에 흐터저 잇는 수천 명 인력거군으로… 금후 운명은 실로 암담하다 하겟더라."(1927년 3월 6일자)

인력거꾼의 퇴조는 물론, 택시회사들의 경쟁도 치열해졌다. 거리에 상관없이 1원을 받는 '원탁시', 운행 거리에 따라 요금을 받는 '메타부 탁시', 삼 분마다 혹은 한 시간마다 요금을 계산하는 '임대 탁시'가 치열한 손님 쟁탈을 위한 '삼각전(三角戰)'을 펼쳤다. 수입은 '일원균일'의 '원탁시'가 가장 많았다.(1927년 3월 26일자)

거기에 7월에는 경성의 전차사업을 운영하는 거대자본 '경성전기회사(京電)'가 "1구역당 십전이란 헐한 요금"으로 승합자동차(버스)사업 진출을 선언, 인력거업계는 물론 '탁시'회사도 대공황에 빠졌다.(1927년 7월9일자) 택시회사와 인력거꾼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28년 4월 22일부터 경성 시내에는 부영(府營)버스가 운영되기 시작했다. 요금은 경전이 책정했던 1구역당 10전보다 싼 7전으로 결정됐다.

버스가 등장했음에도 1929년에는 '탁시'가 300대에 달했고(1929년 7월 29일자), 이듬해에는 '50전짜리' 택시가 등장하는 등 교통기관 간의 경쟁은 가속화됐다. 택시의 가격 경쟁은 속도 경쟁을 불러와 '비행(飛行)택시'의 역사(轢死),역상(轢傷) 사고가 잇달아, 툭하면 '택시가 부녀 압살'(1933년 3월 17일), '택시와 전주(電柱), 뜨거운 키스'(1935년 3월 31일자) 같은 기사가 지면을 장식했다.

버스와 택시가 경쟁하면서 조선일보의 예측대로 서울 시내 인력거꾼의 설자리는 '실로 암담'해졌다. 1920년 자동차 57대, 인력거 1503대였으나,1932년 들어선 자동차 460대에 인력거는 단 132대로 줄어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