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세계 시장에서 한국 디자인 문구의 약진이 매섭다. 과거 귀엽고 깜찍한 캐릭터를 내세운 일본 문구류가 아시아 문구 디자인을 대표했다면 요즘은 심플하면서도 기능적인 한국 문구가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디자이너 엄세영(37·알리프 대표·사진)씨는 유럽 시장에서 한국 디자인 문구의 위상을 개척한 주역 중 하나다.
2004년 프랑스 시장에 진출한 이래 현재 전 세계 50여개국에서 그가 디자인한 제품이 팔린다. 상품 선정을 까다롭게 하기로 소문난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박물관과 퐁피두 센터, 로댕갤러리 등 유명 박물관의 소품숍이 주요 거래처다. 최근엔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푸조 매장과 협업해 제품을 디자인하기로 했다.
"디자인의 프리미어리그는 유럽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의 디자인 실력을 냉정하게 평가받을 수 있을 거라 믿었죠." 6일 서울 논현동 '알리프' 사무실에서 만난 엄씨는 "그냥 예쁜 디자인보다 다를수록, 완성도가 높을수록 평가를 해주는 유럽의 디자인 문화와 우리의 디자인 철학이 맞아떨어졌다"고 했다.
디자인은 잘하지만 상품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드문 국내 디자인 현실에서 엄씨는 모범사례로 인식된다. 그가 밝히는 성공 비결은 꽤 현실적이다. "디자인은 대중과 연애하는 것"이라는 명료한 철학 덕분이라 했다. "데이트를 할 때 아무리 좋은 레스토랑에 가도 여자 친구가 싫어하면 그 데이트는 실패한 것 아닌가요? 디자인이 디자이너 눈에 아무리 좋아 보여도 소비자가 외면하면 소용없는 거죠." 그는 "디자인이 곧 비즈니스이고, 비즈니스가 곧 디자인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알리프 제품의 특징은 알록달록한 원색과 반짝반짝 빛나는 에나멜 소재. 그는 "시행착오를 거쳐 소비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디자인을 찾다 보니 이런 결과물이 나온 것"이라 했다. 명확한 디자인 아이덴티티(정체성)를 가지고 작품군을 만들어가는 대개의 디자이너와는 사뭇 다른 행보다. 엄씨는 "여러분이 디자인하고 우리가 돕는다(You desi gn, We help)는 생각으로 디자인한다"고 했다. '디자인을 위한 디자인'이 아닌, '소비자를 위한 디자인'이 지향점이란 얘기다.
연장선상에서 그저 기발한 디자인보다는 조금 다른 디자인을 지향한다. "제 디자인 슬로건은 'a little more(약간 더)'입니다. 조금 달리하거나 약간의 아이디어만 더해서 확연한 결과의 차이를 주는 거죠."
생활 밀착형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작품이 대부분이다. 중국에 출장 갔을 때 말이 안 통해 화장실 찾기가 힘들었다. 겨우 생각해낸 방법이 종이에다 남녀 그림을 그려 화장실을 표시한 것이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화장실, 식당, 공항 등을 나타내는 픽토그램(공공시설 등을 상징하는 기호 같은 그림)이 프린트된 팔찌 '뱅글 랭귀지'를 만들었다. 말없이 대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여행의 필수품이란다. 전선이 어지럽게 얽혀 있는 콘센트 때문에 애먹고 나서는 각각의 전선이 무슨 기기와 연결된 건지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선용 태그를 디자인했다. 프랑스 편의점에 갔다가 할머니들이 너덜너덜한 수표책을 들고 다니는 걸 보고는 에나멜로 된 수표책용 지갑을 만들어 프랑스에서만 5만여개를 팔았다. 가방에 연결해 옷을 걸 수 있도록 만든 '재킷 클리퍼'는 전시장에서 한 팔에 옷을 낀 채 가방을 여러 개 들고 다니는 사람을 보고 만든 제품. '보이지 않는 손'이란 별명이 붙었다.
때로 소비자의 아이디어가 디자인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한 프랑스 아주머니가 그가 디자인한 명함 보관 수첩을 보고는 프랑스에선 명함 크기가 천차만별이라고 귀띔해줬다. 그 의견을 반영해 명함 꽂는 부분의 크기를 다양하게 만들었더니 판매가 쑥 늘었다. 그는 "거창한 발명보다는 소소한 변화가 때론 더 큰 힘을 발휘한다"고 했다.
국내보다 해외 시장을 주 무대로 하지만 국내 생산을 고집한다. 그는 "얼마 전 우리 제품을 똑같이 베낀 중국산이 나왔지만 유럽 시장에선 안 먹히더라"며 "디자인부터 포장까지 100%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라는 점이 이제 디자인에서도 먹히는 시대가 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