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K아파트. 무너져 내린 콘크리트 벽면 사이로 녹슨 철근구조물이 뒤틀린 채 튀어나와 있었다. 나선형 통로 계단을 올라가자 시퍼런 곰팡이가 벽면을 가득 채웠고 계단 곳곳은 물에 젖어 있었다. 계단 복도 콘크리트 난간은 손으로 밀면 부서질 것 같았다. 아파트에는 입주민 이주를 촉구하는 노란색 바탕의 '재난위험시설 지정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이 아파트 주민 정모(44)씨는 "비가 쏟아지면 방까지 물이 들어찬다"며 "아파트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까 무섭기도 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어 눌러 살고 있다"고 말했다.

이 아파트는 2007년 특정관리대상시설로 E급 판정을 받았다. 2004년 제정된 '재난 및 안전관리기본법'에 따르면 국가는 준공 후 15년 이상 경과된 5층 이상, 15층 이하의 아파트를 특정관리대상시설로 지정해 관리해야 한다. 등급은 상태가 양호한 A급부터 사용 금지 및 개축(改築)이 필요한 E급까지 총 5단계다. D급 시설은 긴급 보수·보강이 필요하고, E급 시설은 붕괴사고 예방을 위해 즉시 사용을 금지해야 하지만 속수무책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D·E급 시설물은 영세한 개인이 소유하고 있거나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재개발·재건축사업이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론 지방자치단체가 정밀 안전 진단 등을 실시해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시설주에게 보수나 철거를 요구할 수 있다. 요구를 듣지 않으면 고발 조치도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서대문구청 관계자는 "일부 주민에 한해선 임대아파트까지 마련해 이주를 촉구하고 있지만 보상문제 등으로 인해 사태 해결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서대문구청은 K아파트 주민들에게 이주촉구통지서만 보내고 있다.

2007년 안전 진단 결과 E급 판정을 받은 서울 서대문구 K아파트. K아파트를 비롯해 D와 E급 진단을 받은 민간건물이 위험에 노출돼 있다.

서울시에 따르면 시내 2만5867개의 특정관리대상 시설물 중 '재난위험시설'인 D·E급 시설물은 각각 388개소와 22개소 등 모두 410개소가 있다. 이 중에서 의무적으로 D급 판정을 받고 관리해야 하는 대형 토목·건축공사장 220여 개소와 보수가 예정돼 있거나 보수 중인 공공시설물을 제외하면 170여 개소의 민간 소유 시설물이 남는다. 서울시내의 노후한 아파트단지나 연립주택 대부분이 여기에 속한다. K아파트 외에도 다른 아파트 56개 동과 연립주택 29개 동이 위험하다는 수준인 D급이나 E급 판정을 받았다. 서울 영등포구 N아파트단지도 13개 동 전체가 D급 판정을 받았지만 현재 재건축조합설립 추진위원회만이 조직된 채 주민들은 그대로 생활하고 있다. N아파트 관계자는 "보수를 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재건축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말했다.

재개발·재건축이 추진 중이라 하더라도 조합 설립 인가나 시공업체 선정까지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한국시설안전공단 박구병 실장은 "장마가 일찍 찾아오는 등 기상 이변이 속출하고, 한반도 일대에 지진 발생 빈도가 늘고 크기도 커지는 추세"라며 "D급 건축물이라 해도 순식간에 상태가 악화돼 E급으로 떨어지고, 최악의 경우엔 붕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전문가들은 1994년 성수대교 사고와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당시엔 '안전진단제도' 자체가 없었지만 현재 기준으로 판단할 때 두 경우 모두 사고 전에는 D급, 사고 직전엔 E급이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전문가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서울시내 170여개의 건물이 '삼풍백화점 참사'와 같은 위험 가능성에 노출돼 있다. 서울 구의동 테크노마트 건물은 안전 진단에서 B급 판정을 받았지만 지난 5일 건물이 흔들려 입주민들이 대피하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시는 노후한 민간 건축물은 관리 주체도 민간이며,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에 문제 해결이 어렵다는 입장이다. 서울시 이인근 도시안전본부장은 "건축물 위험 관리는 당장 시급한 사안이 아니기 때문에 가볍게 생각하기 쉽다"며 "하지만 한 번 사고가 발생하면 어마어마한 인명피해를 불러오기 때문에 사전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