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중순 50대 초반의 K씨가 회사 부근 찻집으로 기자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간첩 정경학을 필리핀에서 목숨 걸고 한국으로 유인했는데도 그 공(功)을 국정원이 가져갔다는 한 시민에 대한 당신의 기사를 읽어 보았다"고 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담배 한 대를 다 피우고 나서야 그는 말을 이었습니다. 1997년부터 5년간 러시아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몰래 반입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이후 러시아 정부에서 입국금지되었으나 한국 정부 기관 누구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입증 자료도 내놓았습니다.
기자는 그를 의심했습니다. "이 내용이 보도되면 러시아에 있는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신변이 위험해진다. 우리 정부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10년 넘게 짓눌러왔던 비밀과 억울함을 털어놓으니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고 했습니다.
국정원에 확인을 했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알아보겠다. 이 문제가 공개될 경우의 외교적 파장 등을 고려해 일단 보도를 자제해 달라"고 했습니다.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국정원은 당시 프로젝트에 참여한 요원들과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 등을 통해 현지조사를 했습니다. 두 달 뒤 답변이 왔습니다. "K씨에게 국가를 위한 공로는 있었지만, 입국금지 조치는 다른 혐의 때문인 것 같다. 국정원이 현실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들여온 탄도미사일은 별 도움이 되지 않았고 대단한 게 아니었다" "그가 국가 상대로 소송을 해도 이길 수 없고 입증이 어려울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국정원의 이 같은 입장은 최근 K씨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의 입장에선 '억울해도 참고 살되 국가 기밀은 유지해달라'는 취지였습니다.
K씨는 "그동안 들은 척도 안 하던 정부가 언론사에 갔더니 그나마 성의를 보였다"면서도 "이젠 입국금지 조치가 풀려도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늦었다. 남은 게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지난주 마음 정리를 위해 강원도 바닷가를 다녀왔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통화에서 국내 언론이 부담스러워하면 외신기자클럽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러시아 대사관에 자수하겠다고 했습니다. 시베리아 형무소면 어떻고 암살당하면 또 어떠냐는 것이었습니다. 러시아와 한국 정보기관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그의 눈에서 분노를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