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에는 전설처럼 회자되는 존재가 있다. 이름하여 '산책하는 빨강돼지'.
녀석들을 어느 봄날 저녁, 뒷산 등산로에서 처음 만났다. 과연 소문대로 범상치 않은 돼지들이었다. 불타는 털, 근육질 몸매, 똘똘한 눈, 멋지게 감겨 올라간 꼬리. 녀석들은 나를 우르르 둘러싸더니 바짓단을 물고, 발 냄새를 맡고, 등산화 끈을 씹어댔다. 그 뒤에서 주인으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계셨다. 내외가 심해 사람을 따르지 않는 놈들인데 내가 타고난 돼지치기 같다는 고견을 내놓으셨다. 돼지농장에서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도 해왔다. 말로만 들어본 '길거리 스카우트'를 당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자주 만났다. 새록새록 정이 들었다. 녀석들은 물고 핥고 비비는 애정공세를 퍼붓고, 내 쪽은 당근과 '훌륭한 돼지가 돼라'는 덕담을 건네면서. 가을이 갈 무렵, 산책 멤버가 대거 교체됐다. 기존 선수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동네 개도 알 만한 일이었다. 심란함 속에서 퍼뜩 깨달은 바 나는 뼈다귀해장국부터 돼지껍데기까지 먹고 사는 인간이었다.
돼지 수백만 마리가 구제역으로 생매장된 지난겨울엔 그때보다 더한 충격을 받았다. 돼지와 고기, 애정을 나누는 존재와 먹을거리, 풀 한 포기와도 교감할 수 있는 인간의 특성과 풀과 고기를 먹어야 사는 잡식동물의 본성 사이에서 혼란과 당혹감과 슬픔을 느꼈다. 그런데도 그리 달라진 것이 없다. 여전히 당근을 건네고, 아직도 삼겹살을 즐기고, 가끔 스스로 묻는다. 돼지와 고기, 어느 하나만 사랑할 수는 없겠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