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부터 파리(蠅)를 열 마리 이상 잡아오는 자에게는 한 마리에 3리(약 60원)씩 얼마든지 사기로 하며…."
조선일보 1921년 4월 23일자 사회면에 경성부가 파리를 사들이기로 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제목이 '엽전 3푼에 승일필(蠅一匹·파리 한 마리)'이다. 나흘 뒤 27일자 신문은 "첫날 사들인 파리는 16만 마리에 가격이 480원, 많이 잡아온 사람이 1만5000마리더라"라고 전했다. 경성부청은 파리를 팔려는 사람들로 혼잡을 빚었다.
경성부는 그러나 시행 하루 만에 한 마리당 값을 1리로 내리고 27일에는 다시 100마리에 3전, 즉 첫날 가격의 10분의 1로 내린 뒤 29일부터는 파리를 사들이지 않겠다고 발표한다. 잡아오는 파리가 너무 많았던 것이다. 조선일보는 "날마다 파리값을 깎을 뿐 아니라 인제는 사지도 않아"(4월 29일자)라고 총독부의 경솔함을 꾸짖었다.
그 후에도 간간이 파리를 사들이던 경성부는 1924년 파리 매입을 완전히 중단한다. 별 효과가 없는 데다 서울 파리를 퇴치하는 게 목적인데 돈을 노린 일부 사람들이 시골 파리까지 잡아다 판다는 게 이유라고 했다. 이를 알린 조선일보 제목은 '파리 장사도 다 해먹었다'였다.(1924년 4월 26일자)
난데없는 '파리매입 소동'이 빚어진 데는 이유가 있었다. 파리 퇴치가 매우 심각한 사회문제였기 때문이다. 총독부는 매월 1일과 15일을 승취일(蠅取日·파리잡는 날)로 정하고 파리 퇴치에 나섰다. 여름만 되면 당시 신문에는 '승 구제(蠅 驅除)' '포승(捕蠅)' '승군토벌(蠅軍討伐)' 등 '파리를 잡자'는 뜻의 구호 같은 말들이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파리는 우리의 원수이니 때려라, 죽여라"(1921년 6월 17일자)는 자극적인 기사까지 보도했다.
"그까짓 파리 갖고 웬 호들갑?"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지만 시곗바늘을 80~90년 전으로 돌려놓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1920년 여름엔 콜레라가 제주도를 휩쓸어 4134명이 사망했고 1921년 4월엔 페스트가 장춘 봉천에서 남하 중이라는 보도가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했다. 매년 끊이지 않는 콜레라·페스트 등 공포의 전염병을 옮기는 매개체가 파리와 쥐, 벼룩이었지만 보건 위생 관념은 취약했고 퇴치약은 빈약했다.
1920~1930년대의 조선일보에는 '여름에 사람을 괴롭게 하는 4가지 벌레'(1925년 7월, 전 5회), '여름의 평화를 깨는 작은 악마 여러분은 쳐서 물리치시오'(1931년 8월 1일) 등 파리박멸에 관한 기사가 끊이지 않았다. 1938년 6월 5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독자 동요 '파리'는 '자는 애기 깨워놓는/파리란 놈 죽여라"고 노래했다. 동요 옆에는 "파리란 놈은 아주 나쁜 놈이지만 이 동요를 읽고 나니 더 한층 밉습니다"라는 편집자의 평이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