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 28년의 베테랑인 서울 용산소방서 노철재(57) 소방관은 요즘도 가끔 사람들이 창틀에 매달려 불타는 꿈을 꾼다. 12년 전 봤던 장면이지만, 온몸에 불이 붙어 고통에 울부짖는 사람들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이 꿈을 꾸고 나면 이불이 땀에 흠뻑 젖는다.
노 소방관이 1999년 한강대교 인근의 모델하우스에서 불이 나 출동했을 때 목격했던 장면이다. 그는 "도착했을 때 입구부터 불이 활활 타올라 도저히 접근할 수 없었다"며 "2층 창가에 사람들이 매달려 살려달라고 몸부림치는 것을 보고도 그들을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려 왔다"고 말했다.
서울 성북소방서 종암센터 119구급출동대에서 근무하는 소방관 노모(46)씨는 지난해 8월 정릉동에서 시너를 뿌리고 불을 붙인 자살자의 사건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다.
불에 탄 환자의 피부가 벗겨져 근육만 드러나 있었고, 몸의 지방이 녹아내려 바닥이 미끈거렸다. 노씨는 "목숨이 남아 있는 환자가 구급차에서 고통스러워하며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것은 고문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주변 사람들은 "매일 그런 장면을 보니 면역이 생기겠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노씨는 "참혹한 광경을 본 날에는 술을 퍼마시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다"며 "비번인 날 조용한 곳에 혼자 있으면 고통스러운 장면이 자꾸 떠올라 괴롭다"고 말했다.
지난달 전남에서는 3명의 소방관이 잇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악조건 속에서 인명을 구조하는 작업을 하다 발생한 우울증 증상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소방관들은 화재, 교통사고, 익사(溺死) 현장 등 최악의 현장을 뛰고 있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는 경우가 많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끔찍한 현장을 경험한 뒤 지속적으로 공포감과 무력감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중앙소방학교에 따르면 화재를 진압하는 고위험군 소방관의 13.3%가 '정신질환 수준의 우울증 증세'를 갖고 있다.
사고 현장을 골라 출동하는 응급대원으로 근무하는 여성 소방관 안모(35)씨는 8년 전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던 날 전깃줄에 목을 매달아 숨진 한 여성과 그 옆에서 울고 있는 아이를 목격했다. 안씨는 "지금도 장마철이나 비가 많이 쏟아지는 날에는 그 장면이 떠올라 너무 괴롭다"고 말했다.
문제는 소방관들 대부분이 이런 고통을 해소할 방법이 없다는 것. 소방관 정모(31)씨는 8년 전 젊은 여성이 자살한 장면이 계속 떠올라 괴롭지만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다. 정씨는 "소방관이 아닌 다른 친구들은 '끔찍하다'며 이런 얘기를 듣기 싫어하고, 신경정신과 치료는 조직 내에서도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있어 꺼려진다"고 말했다.
일본 도쿄소방청에선 소방관들의 건강관리를 위해 소방서마다 정신과 의사와 심리치료사를 두고 있다. 극단적인 사고 현장에 출동한 소방관에 대한 스트레스 장애 등에 대해 의무적으로 상담하도록 한다.
미국에서도 사망 사고를 목격한 소방관에 대해 3일 이내에 신경정신과 상담을 하도록 '스트레스 관리 프로그램'을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소방관의 심리치료를 위한 제도는 물론 예산도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사공준 영남대 예방의학교실 교수는 "극단적인 스트레스를 받는 소방관들이 '정신장애인' 소리를 듣지 않고 심리상담과 정신과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화재나 교통사고, 전쟁, 고문 등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기억이 남아 공포감이나 압박감 등으로 정신적인 고통을 느끼는 증상을 말한다. 소방관들은 극단적인 참사의 현장을 일상적으로 겪고 있어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를 겪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