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지방해양항만청 소속 백원경(50)씨가 31일 '옥조근정훈장'을 받는다. 할아버지·아버지에 이어 그도 '등대지기'로 25년째 근무한 공로다.

정부훈장을 받은 사람들은 드물진 않지만, 평택항(港)으로 가서 그를 만난 것에는 일종의 '낭만'이 작용했다. 3대(代) 등대지기라면 콧수염을 기르고 통기타를 둘러메야 제격일 것이다. 그는 짧은 머리에 피부는 검은 편이었으며, 작고 말랐고 단단해보였다.

백원경씨는 “무인도 등대숙소에 손가락만한 지네가 기어다니니 신혼의 아내가 질색했다”고 말했다. 이덕훈기자 leedh@chosun.com

―'얼어붙은 달 그림자 물결 위에 차고/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혹시 이 노래가 애창곡인가?

"그 노래는 할아버지 아버지와는 어울렸다. 내 어린 기억으로 두 분은 낭만적이었다. 할아버지는 소청도에서 등대지기를 하면서 섬아이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쳤다. 민간요법으로 치료를 해주기도 했다. 군수님이 섬에 오셨을 때, 경찰지서장과 함께 나란히 옆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주위에 숨기고 싶었다."

그는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곤 했다.

"처음 들어올 때는 사명감도 있었는데, 생각과 현실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내가 때가 묻어 그런가. 등대지기가 '낭만'이라면 세상 모르는 소리다. 공무원 조직에서 천시받는다는 느낌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기삿거리가 된다면 '낭만적'으로 써달라."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인천상륙작전(1950.9.15) 당시 팔미도 등대에서 불을 밝힌 인물이다. 당시 등명기(燈明機·불을 밝히는 기계)의 태엽이 고장나 손으로 돌렸다고 한다.

1962년 소청도 등대, 백씨의 조부(오른쪽 첫번째)와 부친(세번째).

"어렸을 때 할아버지로부터 '인천상륙작전의 맥아더가 올 때 새벽 해상에서 함포사격을 해왔다. 그 함포 불빛이 너무 아름다워 수동으로 돌리는데도 힘든 줄 몰랐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도우러 따라갔던 것 같다. 당시 특수부대원이 등명기 작동법을 몰라 할아버지를 모시고 간 것으로 들었다."

팔미도 등대는 1903년 국내에서 제일 처음 세워졌다. 바로 이 등대 숙소에서 그가 출생했다. 팔미도는 주민들이 살지 않는 무인도이기 때문에 이 섬에서 출생한 아이는 그가 유일할 것이다.

"마침 아버지께서 뭍으로 나갔을 때 엄마가 출산했다. 당시 등대에는 남자 직원이 한 명 있었지만 차마 부르지 못하고, 등대 숙소에서 혼자 탯줄을 끊었다. 내 몸무게가 2kg 될까 말까 작아서 가능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목덕도·팔미도·소청도 등 서해안 섬을 돌며 근무했다. 여섯살까지는 부모와 같이 살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인천의 '등대원자녀 합숙소'에서 지냈다. 방학 때 섬에 들어가거나, 휴가를 나온 아버지가 뭍으로 나오면 만날 수 있었다. 1년 중 날수로 계산하면 70일 정도였다.

"그래도 등대지기인 아버지가 멋있어 보였다. 정년 3년을 앞두고 사고가 났다. 당시에는 발전기, 기름드럼통 등을 지게로 날랐다. 아버지는 팔미도에서 발전기를 운반하다가 허리를 다쳤다. 무인도여서 바로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지 못했다. 일년쯤 지나 요추 부분의 압박골절 염증이 암으로 악화됐다. 내가 요리사가 되려고 전문대에 막 진학했을 때였다."

그는 외아들이었다. 집에는 할머니와 어머니, 누나, 여동생이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당장 생계의 문제로 다가왔다.

"장례를 마친 뒤 아버지 상사 되는 분이 '부친 뒤를 이어 3대째 하는 게 어떤가' 물었다.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나쁜 직업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등대지기 일이 너무 외롭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내 길을 가겠다고 답변하자, '어떻게 학비를 감당하려느냐?'고 물었다. 학업을 이어갈 수 없는 형편이었다. 현실 앞에서 다른 선택이 없었다."

그는 10급 기능직으로 특별채용됐다. 발전기를 돌리고 축전지를 보수하는 일은 아버지 어깨너머로 이미 봐왔다. 그러나 그는 섬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야간대학에 등록해놓고 육상근무를 신청했다.

"세상이 자기 뜻대로만 살아질 리 없다. 첫 근무지로 무인도인 '안도'로 발령받았다. 인천서 배로 3시간쯤 가니 등대가 있는 암초가 보였다. 바위섬으로 겨우 축구장 크기만 했다. 설마 저런 곳은 아니겠지 했다. 숙소 건물 하나에 방 3개 있었고, 욕실과 화장실은 공용이었다. 물이 안 나와 배가 한 번 들어올 때마다 물을 50말통씩 내려줬다. 거기에 3명이 상주했던 것이다. 너무 악조건의 근무지라 지금은 무인등대가 됐다."


조부는 인천상륙작전 때
팔미도 등대서 불 밝혀
부친은 등대업무로 숨져


―유배, 고립, 격리… 이런 단어가 떠오른다.

"근무자들끼리 처음에는 가족 얘기도 하지만 좀 지나면 화제가 바닥이 난다. 얼굴만 쳐다볼 때가 많다. 그때는 전화도 없었다. 인천관제실로 기상자료를 무전으로 보내면서 가족 안부를 묻거나 필요한 부식을 보내달라고 전할 뿐이다."

―하루 일상을 어떻게 보냈나?

"등대불을 켜고 유지 보수하는 것 외에 하루 다섯 차례 기상자료를 보내야 한다. 새벽 5시 반부터 업무가 시작된다. 섬 근무는 12시간 2교대다. 요즘은 20일 근무하고 열흘쯤 뭍으로 나와 쉰다. 그때는 두 달 근무하고 일주일간 쉬었다. 나는 제일 막내라서 섬에서 여섯달까지 쭉 지낸 적도 있었다."

―고립된 공간에서 세 명의 사내끼리 불화가 발생하지 않나?

"서로 어려운 처지를 이해하기 때문에, 직원들은 가족 같았다."

―당신은 피끓는 젊음이었을 텐데, '이거 길을 잘못 들어섰구나' 하며 궤도 수정을 하지 않았나?

"스물여섯살 때였다. 두 달 만에 처음 뭍으로 나오면서 되돌아가는 배를 타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다시 대학에 갈 수도 없고 당장 생계도 꾸려야 하는 형편이었다. 이왕 시작했으니 조금만 더 버텨보자고 나 자신을 달랬다. 전축과 레코드판, 그림도구를 챙겨 들어갔다. 밤에는 낚시를 했다. 그렇게 적응해갔다. 안도에서만 3년을 근무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고립된 섬에 던져놓으면 미쳐서 발광할 것이다.

"나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좋았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그랬듯이 내 몸속에 그런 유전자가 있었다. 해가 떠오를 때나, 밤바다에 별이 쏟아질 듯한 광경을 보고 있으면 뭉클하다. 나는 우주의 먼지만도 못한 존재인데 왜 이렇게 아등바등 사는가 하는 상념에 잠기기도 했다. 이따금 참지 못할 고독이 밀려왔다. 그럴 때면 사는 게 뭐 별것이 있냐고 내게 말을 걸었다. 섬에서 오래 지내면 사람들과 부딪치거나 번잡한 삶이 싫어진다. 대인기피증과 비슷하다. 내가 결혼해 살 집도 당시에는 인적이 없는 한적한 시골에 지었다."

그의 두 번째 근무지 역시 '선미도'라는 무인도였다. 그 섬에서 3년쯤 지낸 뒤 잠깐 평택으로 나와 1년간 육상근무를 했다. 이때 결혼했다.

"결혼 상대가 섬에서 살아야 하는 직업을 좋아할 리 없었다. 지금의 아내를 한참 쫓아다녔다. '앞으로 육상근무를 계속 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다시 선미도로 발령났다. 신혼의 아내를 데리고 섬으로 들어갔다. 숙소에 손가락만한 지네와 벌레들이 기어다니니 아내가 질색했다. 두 달도 안 돼 아내는 섬을 떠났다. 각각 섬과 육지에서 떨어져 지냈다."

그는 다시 소청도로 근무지를 옮겨갔다. 소청도는 한때 할아버지가 살았던 곳이었다.

"주민들이 사는 섬이라 외로움은 덜 했다. 대신 술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 등대에 있으면 어촌계·발전소·우체국·전화국·기상대·군부대에서 술을 사 들고 찾아왔다. 어떤 날은 하루에 세 차례나 손님을 받을 때도 있었다. 적성에만 맞으면 등대지기도 할 만하다. 과거와는 달리 유인등대는 관광명소처럼 됐다. 숙소에는 인터넷 에어컨 냉장고 등이 갖춰져 있다. 요즈음 등대원 시험 경쟁률도 50대1쯤 된다. 다만 들어와서 석 달을 못 버티고 절반이 그만둔다."


팔미도 등대에서 출생
신혼살림은 선미도에서
아내는 두 달 뒤 섬 떠나


―등대 생활이 눈 뜨면 똑같은 하루, 또 눈 뜨면 똑같은 하루여서 그런가?

"사실 그런 삶의 단조로움이야 육지에서도 별로 다를 게 없다. 여기서도 매일 같은 사무실로 출근하고 같은 직원들을 본다. 오히려 섬에서 근무하고 한 번씩 나오면 세상이 신천지 같았다."

우리나라 등대는 2000여개, 사람이 상주하는 유인(有人)등대는 38개다. 전체 등대원 숫자는 150명쯤 된다. 이제 등대의 불빛에 의지해 항해를 하는 시대는 아니다. 최첨단 위성항법장치로 정확히 항로를 찾아 들어온다.

―그런데 밤이면 등대 불빛은 꺼지지 않고 여전히 등대지기가 있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아무리 레이더 장비가 좋아도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고 한다. 실제로 도선사(導船士·선박을 안전한 항로로 안내하는 사람)들이 원한다. 도로의 신호등처럼 바다의 길에서도 불빛이 보일 때 안심이 된다고 말한다."

―유인등대를 점차 모두 무인화시킬 수 있는가?

"섬생활 환경이 워낙 열악해 당초 직원 복지 차원에서 추진했던 것이다. 지금은 장비가 워낙 발달해 굳이 사람이 상주하지 않아도 될 정도다. 그래도 유인등대가 꼭 필요한 곳은 있다. 요충지, 항로가 갈라지는 분기점, 배 통행이 많은 곳이다. 무인등대는 고장이 났을 때 당장 복구가 어렵다. 기상이 안 좋으면 공백이 생겨 사고위험이 있다. 또 관광명소가 된 등대에는 관리를 위해서도 사람이 필요해졌다."

그는 2003년 육지로 왔다. 섬의 고독을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웠다고 했다. 15년간의 등대 생활이었다. 현재는 평택항 관내 무인등대 92개를 관리한다. 등대불을 밝히고 끄는 것은 시스템 통제실에서 이뤄진다.

그는 일주일에 사흘은 현장을 나간다. 하루는 해변에 세워둔 등대를, 이틀은 배를 타고 섬을 돈다. 육로의 교통표지판처럼 바다에도 등대, 등표, 등부표 등 항로표지가 있다. 이것들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살피고, 고장난 부품과 수명이 다한 전구를 갈아준다.

"섬 등대 근무가 외롭다면 지금 일은 험하다. 악천후 속에서 현장 작업을 해야 할 때가 많다. 바다에 설치해놓은 등부표가 유실되거나 등대 전구가 꺼지는 것은 기상이 안 좋을 때다. 보고를 받으면 출동해야 한다. 거센 파도 속에서 떠다니는 등부표에 뛰어내려 로프를 건져올려야 한다. 발목과 팔을 부러뜨린 적도 있었다."

―당신들 동료는 '등대지기'로 불리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고 들었다.

"나는 등대지기의 손자고 아들이라는 말을 들어왔다. 공식 명칭은 '항로표지관리원'이나 '등대원'이다."

―중학교 3학년인 아들이 4대째 등대지기를 이어받도록 하고 싶은가?

마지막 대목에서 그는 처음으로 격했다.

"어느 부모인들 자기 자식은 잘난 판검사 같은 걸 시키고 싶어하지…. 정말 직업에 귀천이 없다면 말리지 않겠다. 우리 현실이 그런가. 나는 등대지기가 적성에 맞았지만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창피한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내가 나서서 그걸 시키진 않을 것이다. 아들이 성장해서 자기 판단으로 이 길을 택한다면 못 말리겠지만."

나는 자기 직업에 만족하는 사람을 그렇게 많이 만난 것 같지 않다. 그래도 그 일을 '천직'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선망의 직업이란 거리를 멀찍이 두고 남을 쳐다봤을 때만 존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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