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화단의 대가 치바이스(齊白石·1864~ 1957)는 어지간히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던 모양이다. 열 살 무렵 그의 집은 쌀과 나무가 떨어진 지 오래돼 아궁이에 빗물이 고이고 거기서 개구리가 살 정도였다고 한다. 바이스는 몸이 약해 농사도 못 짓고 목공 일로 생계를 잇다가 나이 서른 넘어 독학으로 그림에 발을 디뎠다(치바이스 회고록 '쇠똥 화로에서 향내 나다').

▶시골의 이름없는 화가를 53세에 베이징 화단에 자리잡게 한 이는 미술계 실력자 쉬베이훙(徐悲鴻)이었다. 베이징의 화가들은 "목수 주제에 시·서·화를 논한다"며 바이스를 화가 대접하지 않았다. 술냄새 풍기며 찾아와 "부부싸움 하다 문짝이 부서졌으니 고쳐달라"며 조롱하는 자도 있었다. 쉬베이홍은 전시회를 함께 열며 치바이스의 그림에 자기 그림보다 높은 가격을 붙이게 했다. 그는 베이징 예술학원장에 임명되자 "교수의 자격은 진실과 실학에 있다"며 엉터리 교수들을 내쫓고 치바이스를 초빙했다.

▶바이스의 명성이 알려지자 1930년대 베이징을 점령한 일본군 고관들이 줄이어 그의 집에 와 그림을 싸게 사려 했다. 그는 이들을 쫓으려 "그림값에는 인정이 통하지 않으니 군자 여러분은 자중하시어 값대로 지불하시오"라고 대문에 써 붙였다. 그래도 발길이 끊이지 않자 다시 '그림 팔지 않음'이라고 더 크게 써 붙였다.

▶'국화대사(國畵大師)'로 추앙받았던 바이스의 장례식은 문호 궈모뤄(郭沫若)가 장례위원장을 맡고 저우언라이 총리가 참석할 정도로 성대했다. 그러나 묘비에는 유언대로 단출하게 그의 고향만 밝혀 '샹탄(湘潭) 사람 치바이스의 묘'라고 새겨졌다. 가난을 알았기에 바이스의 그림에는 서민의 소박하고 따뜻한 숨결이 가득하다. 그는 평생 3만점 넘는 작품을 남겼다.

▶치바이스가 1946년 그린 수묵화 한 점이 그제 4억2550만위안(718억원가량)으로 중국 경매 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고 한다. 그의 다른 그림이 202억원으로 최고가를 경신한 지 일주일 만이다. 작년 전 세계 미술경매에서 치바이스 작품은 3억3900만달러어치가 팔려 1위 피카소(3억5000만달러)를 바짝 뒤쫓았다. 우리 박수근 그림도 1960년대 초 호당 1000원이었던 게 지금은 몇 억원이다. 가난은 예술가의 밑천이다. 그러나 나라는 힘이 있고 돈이 있어야 그 나라 예술작품이 제대로 대접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