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이명박 대통령이 점퍼를 입고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을 찾아 '박살'을 내는 모습을 보고 속 시원하다고 느낀 사람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은 노기 띤 얼굴로 "금감원엔 이전부터 나쁜 관행과 조직적 비리가 있었다"면서 "그것이 쌓여서 오늘 이런 문제가 발생했다"고 했다.
대통령에게 이런 말을 하게 만든 빌미는 물론 금감원이 제공했다. 그들은 검사를 약하게 하거나 눈감아주는 대가로 돈을 받았고 저축은행 대주주와 결탁해 수조원대의 부정대출에 가담했다. 서민들의 예금으로 자기 통장을 살찌웠다. 최근 한두 달 새 구속되거나 기소된 전·현직 간부가 10명을 넘었다. 대통령이 그들을 '공적(公敵)'으로 만들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이날 금감원을 찾은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 뭔가 흔쾌하지 않은 느낌이 든 게 기자만이었을까. '대통령은 왜 국민에게 사과하지 않고 금감원 직원들에게 화만 내는 거야?'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주변에 적지 않았다. 심지어 금감원만의 문제가 아닌데도 '금감원까지'로 선(線)을 그으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사람도 많았다.
아니나 다를까. 책임의 범위는 금감원을 넘어 금융위, 감사원, 검찰, 청와대까지 확대되고 있다. 감사원이 금감원·예금보험공사와 함께 감사를 벌여 부산저축은행의 2000억원대 분식회계를 적발한 것은 작년 초였다. 2조원대의 부실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도 작년 6월이었다. 이후 곪고 곪아 지난 2월 영업정지를 시키기까지 정부는 사실상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길게는 1년, 짧게는 6개월 이상 정부는 기능정지 상태였다. 그런데도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고 심지어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늑장·부실 대응을 한 까닭은 복합적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확인되고 있는 것은 금감원 직원들의 범죄와 모럴해저드뿐이다. 감사원·금융위·청와대의 정책과 판단에 어떤 잘못이 있었는지는 드러난 게 없다. 드러내려는 노력도 없다. 지난 2월 김황식 총리는 국회 답변에서 "이걸 좀 완화해줬으면 좋겠다든지 하는, 일종의 청탁 내지 로비는 있었다"고 했다. 다른 자리에서는 "오만 곳에서 압력이 들어오더라"고 했다. 만약 이 청탁과 로비·압력이 국회나 청와대 등 힘센 정치권에서 온 것이고 그게 조기대응을 막았다면 이번 사태의 본질은 금감원 간부 몇 사람의 비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 된다.
금융위와 금감원 주변에는 작년 11월 개최됐던 G20 정상회의와 늑장대응의 상관성에 의혹을 가진 사람도 많다. 청와대·금융위 모두 저축은행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음에도 G20 정상회의 전에 노출되는 것을 두려워해 문제를 키웠다는 것이다. 이것도 밝혀내야 할 부분이다.
대검 중수부는 금감원 관계자 30여명에 대한 줄소환을 시작했다. 총리실 주도로 만들어진 금감원 개혁TF도 가동에 들어갔다. 대통령은 수사와 조사가 끝난 뒤 이번 사태의 전말을 종합적으로 되짚어보고 책임 있는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대통령 자신이 국민 앞에 전말을 밝히고 사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