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람들의 풍속을 배운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요사히 시내 각 처에는 일본 사람들의 카페 집과 가튼 음식점이 갈수록 �U�U 수효가 늘어간다는데, 이것은 보통 음식�U도 아니요 색주가도 아니요 파는 음식물은 일본료리도 아니요 청료리도 아니요, 조선료리도 아니요 이름도 알 수 없는 것을 팔며, 여자 급사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이 밀매음녀로서 남보기에는 처녀와 가티 꾸며… 극도로 사회의 풍긔를 문란하게 하는 터…" (조선일보 1927년 5월 19일자)

1920년대 일제가 남촌(충무로 명동 퇴계로 일대)에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면서부터 생기기 시작한 카페가 갈수록 늘어나 퇴폐영업을 하면서 경찰이 '취체'(단속)에 나섰음을 전한 기사다. 기생·요리집 중심의 경성 밤 문화가 카페 문화로 대체된 것이다.

남촌의 한 카페와 여급들. 조선일보 1929년 10월 26 일자‘남촌을 차저’르포 기사에 실렸던 사진이다.

1930년대에 이르러선 "작금의 경성은 카페의 전성시대다. 백여개 카페에 천여명의 여급, 청등홍등의 으슥한 불빗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환락의 '짜스(재즈)'는 밤의 경성을 음탕으로 어즈러히 하야…"(1931년 9월 25일자)라고 비판할 정도로 급속도로 번창했다.

경찰은 이 '시대적 도화색(桃花色)'에 두통을 앓았고, "퇴폐적 취미를 접종하는 곳이오, 또 그 제조소인 카페"(1931년 2월 22일자)에서, "웨트렉스들의 써뷔스가 점점 더 도수를 넘처 노골적으로 풍기를 어지럽히는 외에 깊은 밤에도 안면을 방해하는 일이 많음으로 경찰당국의 날카로운 눈은 카페계로 쏠리여"(1933년 5월 24일자) 툭 하면 취체 지시가 내려졌고, 만문만화가 안석영은 "33년식 가정쟁의는 '카페의 성곽 점거'에서 온다"고 주장할 정도였다.(1933년 1월 15일자)

당시 경찰이 밝힌 카페 단속 지침을 보면, '▲내부는 신문을 읽을 정도로 백색 전등을 달것 ▲'빡스'한편은 광장에서 들여다 보이도록 개방 ▲축음긔는 밤 열시까지만 틀 것 ▲영업시간은 새벽 한시까지 ▲여급으로 하야금 딴스나 권하고 음탕한 행동을 시키지 말 것' 등이다.(1931년 9월 25일자) '칸막이'로 구분된 어둠침침한 실내에서 밤새워 축음기를 틀고 재즈에 맞춰 춤추고 음탕한 행동이 이뤄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일본이나 러시아, 독일인 여급이 고용되기도 했다. 조선일보 1932년 1월 1일자는 '환락가에 군림'하는 카페 특집을 싣고,"여급들을 오사카동경에서 비행기로 실어 나르고, 거대한 벌판 같은 규모로 일종 기업적 발전을 보고 있다"고 전했다. 또 카페에 외국 여자를 고용하지 말라고 재삼 지시했음에도, 이를 어기고 독일 여자(29)를 고용한 '살론 아리랑'과 러시아 여자(28)를 고용한 '본미인좌(本美人座)' 주인에게 과료 10원을 부과하기도 했다.(1931년 10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