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이화여대 총장 선출을 앞두고 원세훈 국정원장 등 국정원 고위 간부들이 이화여대 학교법인 이사들을 잇따라 접촉하는 등 총장 선거에 개입한 사실이 드러났다.

익명을 요구한 이화여대의 한 핵심 관계자는 "작년 총장 선거 당시 국정원 고위 인사들이 법인 이사들을 만나는 등 (총장 선거에) 개입하려는 의도가 곳곳에서 나타났다"면서 "대학 선거에 국정원 등 정부가 관심을 갖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만 조직적으로 관여하려 한 점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본지는 이 핵심 관계자가 객관적으로 충분히 신뢰할 만한 인사라고 판단, 그의 증언을 통해 당시의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익명’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취재했다. 또 다른 이화여대 관계자도 “당시에 국정원이 총장 선거에 직·간접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던 건 분명한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지난해 5월에 치러진 이화여대 총장 선거에는 김선욱 로스쿨 교수(현 총장) 외에도 A 교수 등 모두 4명이 출마했다. 총장추천위원회는 5월 25일 후보자 소견 발표회를 개최하고 투표를 실시한 결과 김선욱 교수를 비롯한 3명을 총장 후보로 재단에 추천했다.

이화여대의 총장 선출은 교수, 법인 추천자, 직원, 동창 등 25명으로 구성된 총장추천위원회(이하 총추위)에서 투표를 해 상위 득표자 3명을 법인 이사회에 추천하면 재단이사회(현재 6명으로 구성)가 이 가운데 1명을 총장으로 선임하는 방식이다. 양강 구도 속에서 치러진 당시 투표에서는 김 교수가 A 교수보다 1표 많이 득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화여대 총장 선거는 김선욱 후보와 A 후보의 팽팽한 접전 양상으로 치달았고 후보 간 신경전도 치열했다. 특히 두 후보의 경쟁은 노무현 전 정권과 이명박 현 정권의 대결 양상을 띠면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김선욱 교수는 노무현 정권에서 법제처장과 국가인권위원회 정책자문위원장을 지냈고, A 교수는 18대 총선 당시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을 맡았다. 두 사람의 대결 과정에서 김 교수는 '페미니즘 전통'이 강한 이화여대 주류 그룹이 밀었고, A 교수는 현 정부에 우호적인 교수 그룹이 지원했다. 이런 대결 구도를 두고 당시 이화여대 주변에선 "좌파 세력과 현 정권의 대결 구도"라는 관전평이 나오기도 했다.

당시 법인 이사회는 추천 후보 3명 가운데 다득표를 한 김선욱 교수를 총장으로 선임했지만 그 과정에서 당연직 이사였던 이배용 당시 총장은 자신의 임기 전반에 처장으로 임명했던 A 교수를 지지했다. 이 때문에 이화여대 법인 이사회는 총장을 선임하면서 전원 합의를 이루지 못한 첫 번째 사례를 남겼다.

국정원 고위 인사들이 이화여대 법인 이사들을 만난 시점은 총장 선거를 3개월여 앞둔 2010년 2월경이었다. 국정원이 처음 접촉을 시도한 사람은 윤후정 당시 법인 이사장(지난 2월 말까지 이사장으로 재직하다 현 장명수 이사장으로 바뀜)이었다.

이 사실을 파악한 기자는 이를 확인하기 위해 두어 달 동안 윤 전 이사장 비서실을 통해 접촉을 시도했으나 성사되지 않다가 최근 들어 윤 전 이사장과 직접 전화통화를 하는 데 성공했다.

윤 전 이사장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A 교수가 나를 찾아와 ‘원세훈 국정원장을 한번 만나 보시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내가 거절했다”며 “우리 대학과 관련된 이슈도 없는데 내가 정보기관 수장을 만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후 국정원은 다시 윤 전 이사장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원세훈 국정원장이 직원을 통해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해왔으나 윤 전 이사장이 다시 거절하자 며칠 뒤에는 박성도 당시 국정원 2차장이 다시 윤 전 이사장과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해왔다. 윤 전 이사장의 말이다.

“작년 2월에 국정원장이 만나고 싶다고 연락이 왔는데 거절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국정원 2차장이라는 분이 비서실을 통해 만나고 싶다고 다시 연락이 왔다. 우리 직원들이 ‘더 이상 피하는 건 여러모로 부담스러울 수 있으니 한번 만나보시는 게 어떻겠냐’고 해서 만났다. 만나서 얘기를 나눠보니 무척 점잖은 분이셨다. 이날 서로 예민한 내용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그냥 알맹이 없는 얘기만 했다. 총장 선거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 그럼 왜 찾아온 건가.
"속내를 모르겠더라. 다만 내 느낌으론 총장 선거 관련해서 얘기를 듣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자꾸 만남을 피하니까 그냥 학교 돌아가는 얘기나 가볍게 하자면서 접근한 것 같다."

- 국정원 관계자를 과거에도 만난 적이 있나.
"아니다. 국정원에서 나를 만나자고 한 건 처음이었다. 난 사람을 잘 안 만나는 스타일이다. 게다가 뜬금없이 국정원에서 날 보자고 하니까 굉장히 의아했었다."

이화여대의 한 관계자는 “당시 윤 전 이사장은 가까운 주변 분들께 ‘왜 자꾸 국정원에서 나를 보자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다. 일부 인사들은 ‘총장 선거에 나선 A 후보가 국정원장과 차장을 동원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것 아니냐’는 해석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국정원 측은 2차장이 윤 전 이사장을 만나고 나서 며칠 뒤 다시 법인 사무실로 직원을 보내 윤 전 이사장과의 면담을 시도했지만 윤 전 이사장은 이 역시 거부했다고 한다.

윤 전 이사장은 “(국정원 직원을) 만나서 할 얘기도 없고 필요성을 못 느껴 그냥 돌아가시라고 했다. 국정원 직원은 비서실장과 대화를 나누고 돌아간 걸로 알고 있다. 그즈음에 다른 이사도 국정원에서 접촉이 왔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윤 전 이사장은 국정원까지 관심을 보일 만큼 당시 총장 선거가 과열된 분위기였느냐는 질문에 “한쪽에서는 ‘좌파 후보는 안 된다’는 말이 나왔고 다른 쪽에선 ‘국가 권력을 이용하는 후보가 있다’는 식의 말이 학내에서 회자됐다. 조금씩 과장된 부분도 있고 선거가 과열되는 것 같아 정도(正道)로 이끌려고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윤 전 이사장의 말대로 국정원은 다른 법인 이사와도 접촉했다는 것이 복수의 이화여대 관계자들의 주장이다. 특히 법인 이사 중 윤 전 이사장 다음으로 학번이 높은 장명수 당시 이사(현 이사장)는 원세훈 국정원장이 직접 만났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당시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는 이화여대 핵심 관계자의 말이다.

"원세훈 국정원장이 당시 장명수 이사장을 만난 것은 사실이다. 장 이사장에게는 처음에 국정원 직원이 연락을 해서 '원장이 만나고 싶어한다'는 말을 전달했다고 들었다. 당시 장 이사장은 언론계의 아는 후배들에게 국정원장과의 만남 여부에 대해 조언을 구했고 '할 말이 있으면 직접 오라고 답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해서 그렇게 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국정원장이 직접 장 이사장에게 전화를 걸어와 만나자고 제안을 했다. 원장이 직접 전화를 한 상황에서 더 이상 안 만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런 내용은 장 이사장이 가까운 이화여대 책임자들에게 직접 한 얘기다. 이때도 국정원장은 그냥 밥만 먹고 엉뚱한 얘기만 하다가 헤어졌다고 한다."

국정원장과 식사를 하고 난 며칠 뒤 장 이사장에게는 평소 알고 지내던 모 인사가 ‘국정원의 메시지’를 들고 찾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앞의 핵심 관계자의 말이다.

“국정원장과 만난 2~3일 뒤 장 이사장을 잘 아는 사람이 장 이사장에게 찾아와 ‘주변에서 A 총장 후보를 지지해 달라는 입장을 전달해 달라고 하더라’고 전했다. 당시 장 이사장은 이 인사에게 ‘A 후보를 지지해 달라는 사람 중 한 명이 원세훈 원장이냐’고 묻자 이 인사가 ‘그렇다’고 했다. 그래서 확인이 된 거다. 고위직에 있는 분들은 그냥 만나기만 하고 의사표시는 다른 사람을 통해 한다는 걸 그때 알았다.”

기자는 이러한 메신저가 실제 있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장 이사장과 통화를 했다. 장 이사장은 당초 원세훈 국정원장을 만난 사실 자체부터 부인했다.

장 이사장은 기자와의 첫 통화에서 “총장 선거 당시 국정원장은 만난 적도 없고 연락을 받은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장 이사장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진짜 국정원장을 만난 적이 없느냐”고 재차 확인에 들어가자 말이 조금 달라졌다.

기자가 "국정원장과 만난 적이 없다고 했는데 취재를 해보니 사실과 달랐다"고 말하자 장 이사장은 "(원세훈 원장은) 서울시에 재직하고 있을 때부터 알던 사이다. 하지만 (총장) 선거와 관련해서는 만난 적이 없다. 만난 시점은 메모를 확인해 봐야겠지만 국정원장이 되고 나서 두 번 정도 만났다. 내가 기자에게 누구를 만났는지 다 말해야 할 이유는 없지 않느냐"고 답했다.

원세훈 원장은 2009년 2월 국정원장에 취임했다. 통상 후보들이 1년 이상 준비를 하는 대학 총장 선거 일정상 2009년부터 이화여대 총장 선거는 대학가의 이슈가 됐었다.

하지만 장 이사장은 “실제 A 후보를 지지해 달라는 국정원장의 메시지를 받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A 후보를 도와주라는 얘기를 내게 전달한 사람은 없다. 누가 자꾸 그런 말을 만들어내는지 모르겠다”고 끝까지 부인했다. ‘국정원장의 메신저’ 건을 기자에게 말해준 이화여대의 핵심 관계자는 장 이사장의 이 같은 태도에 대해 “장 이사장은 현직이기 때문에 언론에 공식적으로 확인해 주기 곤란한 측면이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정원은 왜 이화여대 총장 선거에 이처럼 높은 관심을 보였을까. 이와 관련, 이대 일각에서는 2008년 있었던 ‘학내 소동’을 거론하는 이들이 있다.

이화여대 출신인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보건교육과 66학번)가 2008년 5월 31일 ‘대학 창립 122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자랑스러운 이화인상’을 받았는데, 당시 현장에서 몇십 명 학생들의 반발과 항의를 받고 오찬 행사를 앞당겨 마무리한 뒤 돌아간 적이 있다.

이 행사 1주일 뒤 일부 재학생과 졸업생은 “김윤옥 동문의 자랑스러운 이화인상 수상 철회를 요구합니다”라는 문구가 담긴 광고를 한겨레신문 1면에 실었다. ‘자랑스러운 이화인상’ 행사를 주관했던 이배용 당시 총장은 이 사건으로 난처한 입장에 처했고 “학생들의 반발 뒤에 배후가 있는 게 아니냐”는 얘기들이 대학 내 일각에서 나왔다고 한다. 당시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논란으로 촉발된 반정부 폭력시위가 한창이던 시점이었다.

국정원 외에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총장 선거에 관심을 보였다는 증언도 있다. 이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재단이사들을 접촉한 국정원과 달리 총장 후보를 압축하는 투표권을 가진 총추위 위원 1명을 접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은 청와대를 떠난 이 고위 인사가 자신의 인맥을 통해 법조계 출신 총추위 위원에게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이화여대의 한 핵심 관계자는 “선거를 앞두고 청와대 고위 인사를 만난 법조인 출신의 한 총추위 위원이 ‘내가 별로 마음에 두고 있지 않은 총장 후보로 거의 (판세가) 기울었다는 얘기를 전해듣고 사표(死票)가 되지 않으려면 A 후보로 갈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다”고 했다.

이 핵심 관계자는 “그럼에도 결과는 김선욱 후보의 승리로 끝나자 외부에 계신 분들은 ‘정부가 뒤에서 밀었는데도 실패하다니, 오히려 그게 더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했다. 이 핵심 관계자는 또 이렇게 말했다. “이화여대 부총장 출신으로 정부에서 일하는 분이 ‘정보기관에서 대학 총장 선거에 관심을 갖는 걸 막아보려고 했으나 그게 먹히질 않는다’는 말도 내게 하더라. 일부 국회의원도 그때 일을 잘 알고 있다. 이화여대는 여성주의적인 뿌리가 있는 학교인데 권력 지향적인 인사가 총장이 되는 건 적절치 않다.”

지난 4월 11일 기자는 국정원이 도와주려했다는 의혹의 대상자인 A 교수를 만나봤다. A 교수는 ‘국정원 개입 의혹’에 대해 “좌파 세력이 음해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대학 총장 선거와 관련해서 국정원장과 만나거나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최근 몇 년간 만난 적이 없다. 1년 가까이 지난 사안이고 아쉽게 패배한 사람 입장에서 당시 일을 거론할 이유도 없다.”

A 교수는 "보직 교수까지 한 사람이 학교의 치부를 들추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하지만 학내 기득권 세력에 대해 누군가 조명해 볼 필요는 있다"는 말도 했다. A 교수에게 다시 "윤후정 전 이사장에게 국정원장을 소개하려 한 적이 없느냐"고 물었지만 A 교수는 "없다. 그 부분은 전·현직 이사장을 직접 만나 취재하기 바란다"고 답했다.

A 교수는 현 정권 초기 청와대와 내각의 몇몇 고위 인사들이 참여하는 비공식적 모임에도 동참했다. 이 모임의 알려진 참석자는 원세훈 당시 행안부 장관, 안병만 당시 교과부 장관, 이종찬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 A 교수 등이 있다. 이종찬 전 민정수석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A 교수가 총장 선거에 나선다기에 잘 해보라고 격려했으나, 특별히 도와준 것은 없었다"며 "당시에 그런 모임이 있긴 있었지만 특별히 '모임'이라 하기도 그렇다"고 말했다.

국정원은 원장 등 고위 인사가 총장 선거에 개입한 의혹에 대해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4월 12일부터 국정원 공보팀장 등 복수의 국정원 관계자를 통해 수차례 원세훈 원장의 해명을 요구했으나 4월 15일 기사 마감 시간까지 “비서실로 관련 내용을 전달했다” “기다려달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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