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전 김홍조

"기미독립만세 당시 청소년의 유혈순국을 좌시할 수 없어 윤현진을 대동하고 극비리에 상해로 밀행하여 임시정부 이시영을 방문하고 방대한 헌금을 하고 귀국하였다." 구한말 울산의 선각자였던 추전(秋田) 김홍조(金弘祚·1868~1922)에 대한 '연대별 약사(年代別 略史)'에 나오는 내용이다. 김홍조는 3·1 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3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김홍조는 사업가 언론인 금융인 등으로 널리 활동했던 분이다. 또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데도 발벗고 나섰다. 염직공장을 세워 기술자를 양성하고 동경 유학생 17명의 학비를 부담하고 서울, 부산 등지로 유학생을 보내 학업을 지원하기도 했다. 송석하의 아버지 송태관, 박정희 대통령의 은사인 박관수, 교육자이자 국회의원을 지낸 설두하, 변호사로 나혜석의 남편이었던 김우영 등이 수혜자들이었다. 김홍조는 개화운동에 적극 나서 스스로 반상(班常)과 적서(嫡庶)의 차별을 철폐하고 하인을 해방시키는 일에 솔선수범하였다. 명절이나 길흉사, 춘궁기에 어려운 이웃을 돕고 학교설립과 교량건설, 수리시설, 농잠을 장려한 일도 잘 알려져 있다. 또 학성공원과 작천정을 울산읍과 언양 사회에 기부한 주인공으로 울산의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모범이라 하겠다.

▶김홍조는 독립운동에도 적극 관여하였다. 박상진 의사의 대한광복단 비밀요원으로 활동하면서 군자금을 내고 이시영이 운영하던 독립군 양성기관인 만주의 신흥무관학교의 운영자금을 지원했다. 1951년 초대 부통령이 된 이시영은 김홍조의 묘소에 참배하기 위해 울산을 찾아왔다. 1921년 상해에서 독립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태평양회의한국외교후원회에 불교대표로 참여했고 위싱턴에서 열린 태평양 회의에 제출한 의견서에 서명하여 우리나라의 독립청원에도 일조했다. 이뿐만 아니라 백산상회 설립을 주도하고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수립에 이바지하며 의정원 의원이 되기도 했던 그는 귀국 후에는 국내 독립자금 조달의 책임을 맡기도 했다.

▶이처럼 김홍조는 울산의 사업가로 큰 부를 이루었고 이를 지역과 나라의 인재양성과 언론 창달, 금융 실업진흥에 쏟아부었고 독립운동과 자선·기부에 활용했던 선각자요 의인이었다. 1922년 7월 20일 세상을 떠나 학성공원에 묻혔다가 남구 옥동공원 묘원으로 옮겨졌다.

▶1919년 4월 13일 중국 상해에서 일제에 조직적으로 항거하기 위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지금 우리 헌법에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해 놓았다. 임시정부는 민주공화국을 표방하고 민족의 역량을 최대한 결집하기 위해 좌우합작을 했고 삼균주의와 홍익인간의 정신을 보듬어 국민이 주인된, 더불어 잘 사는 나라를 지향했다. 오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2년이 되는 날이다. 임정의 건국이념과 법통을 되새겨야 할 뜻 깊은 날이다. 오늘을 계기로 김홍조를 다시 주목했으면 한다. 아울러 울산의 거인 김홍조의 독립정신과 활동을 재조명하고 자료발굴과 연구에 관심 갖기를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