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국세청은 지난 2008년 초 알프스 산악지대에 위치한 조세피난처인 리히텐슈타인의 LGT은행 금융 계좌에 대해 대대적인 탈세 조사를 했다. 리히텐슈타인 최대 금융그룹인 LGT은행을 통해 독일 부호들이 탈세를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당시 독일 비밀 정보기관이 LGT은행의 전 직원으로부터 500만유로를 주고 고객 정보가 담긴 CD를 입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독일 국세청 등 과세 당국은 이 정보를 바탕으로 탈세 혐의자들의 집과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을 벌여 1억8000만유로의 세금을 회수했다.

CD엔 독일인 600명을 포함해 미국·영국·프랑스·캐나다·스페인 등 10여개국 국민 1400여명의 상세한 계좌 정보가 포함돼 있었다. 이 정보는 각국에 전달됐고 이들 국가도 리히텐슈타인에 비밀 계좌를 둔 자국 부유층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스페인은 200여명이 2억유로를 은닉해 탈세한 사실을 적발했다. 영국도 돈을 주고 거액 예치 고객 명단을 확보했고, 미국과 프랑스는 영국으로부터 무상으로 정보를 넘겨받아 수사에 착수했다. 역외(域外) 탈세를 근절하기 위한 각국의 공조체제가 구축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세피난처와 이곳에 자금을 은닉한 부호들 사이에선 '리히텐슈타인 공포'라는 말까지 유행했다.

2009년엔 300년 동안 고객 정보를 비밀에 부쳐 온 스위스의 은행 비밀주의가 미국 과세 당국에 의해 파헤쳐졌다. 2008년 11월 스위스 은행 UBS의 부유층 고객 관리 책임자가 수천 명의 미국인 고객들의 자산 200억달러를 은닉하는 데 공모한 혐의로 미국 법정에 기소됐다. 2009년 2월 UBS가 기소 면제 대가로 벌금과 함께 탈세혐의가 있는 미국인 고객 300명의 명단을 넘긴다는 데 동의했지만 미국 국세청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5만2000명의 고객 정보를 확보하기 위한 소송을 하겠다고 밝혔다. 또 스위스 계좌를 보유한 미국인들이 자진 신고할 경우 형사 처벌을 면제해 주겠다는 방안을 제시하면서 1만5000여명의 자금 은닉자들을 찾아냈다. 결국 2009년 8월 UBS는 탈세 용의자 4450명의 명단과 계좌 정보를 미국 세무 당국에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이에 이탈리아·캐나다·프랑스 등 다른 국가들도 속속 정보 공개를 요구하고 나섰고, 스위스는 12개국과 고객 비밀 정보를 교환하는 내용이 담긴 조세협정을 맺었다.

스위스 은행 비밀 계좌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외국인 부유층 고객들이 스위스를 떠나갔다. 금융산업 소득이 국민소득의 12% 정도를 차지하던 스위스 경제가 타격을 받을 정도였다.

박기백 서울시립대 교수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세수가 부족해진 미국·영국 등이 조세피난처 국가들을 압박하면서 탈세 정보가 공개되고 있다"며 "앞으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G20(주요 20개국) 등 국제 조직을 중심으로 이러한 움직임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