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도회지의 봄! 꽃! 창경원의 벚꽃! 이것을 차저 몰려든 시골 손들로 서울 장안은 요즘 사람사태가 났다.
노리터 노리터마다 꽃바다! 거리거리마다 사람물결! 서울 장안은 한때의 꽃덕택을 입어 '인플레이션' 세월을 만난듯 와글와글 하고 있다." 조선일보 1936년 5월 3일자가 전한 창경원 벚꽃놀이 기사다.
일제가 조선을 병합한 이후, 일본 벚꽃놀이 풍습이 들어오면서, 봄만 되면 경성 시민은 창경원과 장충단 공원, 혹은 멀리 우이동이나 인천, 월미도, 개성으로 꽃놀이를 떠나는 게 유행이었다.
일제는 1907년 일본의 상징꽃 같은 벚꽃을 창경궁에 심었으며, 1911년엔 '궁(宮)'이 '원(苑)'으로 격하되어 창경원이 시민들 꽃놀이터의 하나가 됐다. 1924년 4월 20일, '창경원 야앵(夜櫻·밤 벚꽃놀이)'이 처음 실시되면서 조선의 봄 꽃놀이 문화는 완전히 바뀌었다.
'야앵'은 단순히 밤에 벚꽃 구경만 하는 게 아니었다. 휘황찬란한 오색 전등의 '일미네이?V(illumination)' 아래, 이왕직(李王職·조선왕실 사무 담당 기구)이 주관하는 아악과 양악 연주, 기생들의 검무, 야외 영화상영과 '라듸오' 공개 무대가 펼쳐지는 조선 유일의 '종합엔터테인먼트' 장소였다.
망국의 한이 서린 곳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람들은 너도나도 창경원에서 먹고 마시고 놀았다. '창경원 야앵'은 '30만 경성시민이 손꼽아 기다리는 밤의 환락장'(1929년 4월 15일자)을 넘어,'어마어마한 시골관광단이 창경원으로!' 몰리면서 '장사군들은 돈궤짝을 바라보고 만족'하는(1936년 5월 3일자) 조선 최대 축제로 자리 잡았다.
보통 일주일가량 이어진 '야앵' 기간 동안, '꽃에 미친 어머니, 미아 45건'(1932년 4월 28일자), '당신의 나들이를 엿보는 도적, 꽃구경도 좋지만 문단속도 철저히'(1934년 4월 17일자), '야앵표 파는곳에 소매치기가 우글우글'(1939년 4월 19일자) 같은 사건·사고도 비일비재했다.
'야앵에 미처난 군중이 일주일 밤낮동안 16만여명(1932년 4월 28일자)'에 달하는 등, 입장객이 폭증하자 이왕직은 1935년부터 입장료를 10전에서 20전으로 배나 올렸다. 그러자 첫날 입장객이 3000명에 그쳤고, 이튿날에도 6000명에 불과, '창경원 야앵' 신화는 깨지는 듯했다. 그러나 요란한 전등불과 각종 공연의 유혹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사흘 만에 다시 전과 같은 북새통을 이룬 것이다.
'창경원 밤벚꽃놀이'는 광복 후에도 서울 최대의 관광 이벤트로 이어지다가 1984년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창경궁 복원 공사가 이뤄지면서 6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벚나무도 어린이대공원과 여의도 등으로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