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호대로는 '하정로'로, 망우로는 '왕산로'로."

내년 1월부터 전국 주소를 모두 도로명으로 바꿔 표시하는 '새 주소 사업' 본격 시행을 앞두고 서울시 일부 자치구에서 확정한 도로명을 다시 바꿔달라고 요구하면서 승강이가 벌어지고 있다.

동대문구는 지난 15일 천호대로로 통합된 '하정로' 이름을 되살려 달라고 도로 관리처인 행정안전부에 요청했다. 지난달 망우로 일부 구간을 '왕산로'로 바꿔달라고 신청한 데 이어 두 번째다.

영등포구도 지난 10일 여의대방로 일부를 '여의샛강로'로 바꿔달라고 관리 책임처인 서울시에 요청했다. 여의대방로 같은 시내 도로는 서울시, 경기도 하남으로 이어지는 길목인 천호대로나 구리로 연결되는 망우로처럼 시·도를 넘나드는 도로는 행안부가 관리한다. 도로 이름은 주소를 사용할 주민 중 5분의 1 이상이 원하면 지자체에서 변경안을 낼 수 있다.

"지역의 자랑을 간직해야"

도로 이름을 바꾸려는 지역은 각각 깊은 사연을 갖고 있다. 신설동역 교차로에서 신답철교로 이어지는 1.65㎞를 '하정로(夏亭路)'로 되살리려는 동대문구는 전통의 복원을 내세우고 있다.

하정로는 세종대왕 시절 청백리였던 하정공 류관 선생 호(號)에서 유래했다. 1984년부터 하정로로 불리다가 '1도로 1명칭' 원칙에 따라 작년 3월 강동구 상일동에서 시작해 신설동까지 이어지는 천호대로에 흡수·통합됐다.

동대문구 이동연 자치행정과장은 "유서깊은 도로명을 없앤 것은 탁상행정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주장했다. 주민 최선학(67)씨는 "멀리 떨어진 천호동의 지명이 여기까지 이어져 어색하다"며 "도로 이름은 지역색에 맞아야 한다"고 했다.

망우로를 왕산로로 바꾸는 이유는 이미지 쇄신이다. 현재 신설동교차로부터 시조사삼거리까지 3.15㎞ 구간이 왕산로이며, 시조사삼거리부터 중랑교까지 1.56㎞ 구간은 1972년부터 망우로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동대문구청은 "망우로는 망우리 공동묘지를 떠올리게 한다"며 "그 이름을 없애고 왕산로를 연장하겠다"고 밝혔다. 왕산로는 구한말 왕산(旺山) 허위 의병대장의 호를 딴 이름이다.

영등포구는 동작구 신대방동에서 원효대교 북단으로 이어지는 여의대방로(5.7㎞) 가운데 지하철 샛강역부터 원효대교 북단까지 여의도를 가로지르는 2.55㎞ 구간이 '대방'이라는 지명(地名)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원래 이 구간은 원효대교 북단 부근 한강을 조선시대에 용호(龍湖)라고 불렀던 데에서 유래, 1984년부터 '용호로'라고 불리다 지난해 4월 여의대방로에 통합됐다.

"주민 요구 들어주다 보면 한도 끝도 없어"

도로명 변경안은 민간인과 공무원으로 이뤄진 도로 관리단체의 주소위원회(서울시 15명, 행안부 20명)에서 심의해 변경 여부를 결정한다. 동대문구와 영등포구가 낸 변경신청안은 4월쯤 결론이 날 전망이다.

변경안을 처리해야 하는 행안부와 서울시는 난처한 입장이다. 자치구의 요구를 다 들어주다 보면 새 주소 사업의 큰 틀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행안부 지방세분석과 진명기 과장은 "새 도로명을 부여한 지 1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너무 쉽게 변경안을 허용하면 자치단체들이 너도나도 민원을 낼 수 있어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이미 설치가 모두 끝난 도로 명판을 뜯어내고 새 간판을 달아야 하는 것도 문제다. 이번에 변경신청안을 낸 세 곳의 이름을 바꾸면 총 1억8000만원가량의 추가비용을 지자체가 부담해야 한다. 그래서 그 돈을 주민 복지를 위해 쓰면 더 좋지 않겠느냐는 지적이 나온다.

망우로에서 28년째 오토바이수리점을 운영하는 김준호(52)씨는 "수십년 동안 이어진 멀쩡한 도로 이름을 왜 바꾸려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여의도 직장을 다니는 강한승(30)씨는 "도로명이 자주 바뀌면 주소가 복잡해지고 사람들이 헷갈릴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