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기 논설위원

미국에 이민 가서 중·고등학교를 마친 한 학생이 자기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서울 떠나온 지 7년,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다. 가게에서 물건 살 때 세금 계산이 얼른 안 된다. 식당에서 메뉴 주문할 때도 가짓수가 두셋만 넘으면 합산이 안 된다. 미국 학교 와서부터 수학시간에 계산기를 썼다. 그래서 내 뇌가 퇴화한 건가…."

수학 수업이나 시험시간에 계산기를 쓰게 하는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가 있다. 미국·영국·호주 등이 전자에, 한국·일본·싱가포르 등이 후자에 속한다. 그런데 얼마 전 우리 교육과학기술부가 고등학교 수학시험에 계산기 사용을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사교육 유발 주범인 문제풀이식 수학교육을 실생활과 연계된 '쉽고 재미있는 수학'으로 바꾸겠다면서 한 말이다. 만약 이 구상대로 계산기 허용이 현실화된다면 우리 60년 교육사(史)에 최대사건의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수학 수업에 계산기를 쓰게 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세계 교육계의 오래된 논란거리다. 허용하자는 쪽은 단순한 계산훈련보다 수학의 기본 개념을 이해하고 폭넓은 사고를 하도록 하는 것이 진짜 교육이라고 주장한다. 반대쪽은 어린 나이부터 기본계산이 손과 머리에서 익숙해지도록 훈련시켜야 한 차원 높은 개념도 쉽게 이해할 수 있고 그걸 바탕으로 창의력도 키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논쟁의 배경에는 진보주의 교육관과 전통주의 교육관의 뿌리깊은 대립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논쟁이 가장 뜨거웠던 나라가 미국이다. 1989년 미국수학교사협의회(NCTM)가 수업에 계산기 사용을 허용한다는 방침을 발표하면서 이후 몇 년간 '수학전쟁(Math Wars)'이라 불리는 대논쟁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계산기 허용파가 이기면서 1994년부터 수학 수업은 물론 대학수학능력시험(SAT)까지 계산기를 지참할 수 있게 됐다. 그 후의 상황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다. OECD 국제학업성취도 평가에서 미국 학생들의 수학·과학 점수는 한 번도 참가국 평균치를 넘지 못한 채 바닥에서 맴돌고 있다. 미국 자체 학력평가에서도 8학년 학생의 14%만이 7학년 수준 이상의 점수를 받고, 12학년(고3)마저 절반가량만이 7학년 수준 문제를 풀 줄 안다.

계산기 사용과 수학 실력 사이의 상관관계를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이론은 아직 없다. 하지만 계산기를 쓰는 영국·호주 학생들의 수학 성적도 OECD 국가 중 중간 이하다. 반면 계산기를 쓰지 않는 한국·일본·싱가포르 학생들은 항상 최상위권이다. 최소한 정황증거는 있는 셈이다. 무엇보다도 미국이 후회하고 있다. 2006년 조지 부시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수학전쟁'의 쟁점들을 면밀히 검토한 국가수학자문단(NMAP)은 2008년 "(진보 쪽 주장인) 수학 개념의 이해와 (전통 쪽 주장인) 계산 능력의 함양은 어느 한쪽이 아니라 똑같이 중요하다"는 보고서를 냈다. 사실상 계산기 허용파의 패배를 선언한 것이다.

미국이 지금도 계산기 수학 수업을 하고 있는 것은 계산기 수업세대가 교사가 되어 교실을 장악하고, 계산기 공급 시장(市場)의 덩치가 너무 커져버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우리가 계산기 수학 수업을 도입한다면 미국의 17년 전 실패한 선택을 뒤쫓아가는 것이 된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리 수학교육의 장점을 포기하려면 미국의 전철을 밟지 않게 할 완벽한 논리와 확실한 보장책을 제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