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어 버빈스키

조니 뎁(Depp)이 카멜레온이라니. 장편 애니메이션 '랭고'의 감독 고어 버빈스키(Verbinski)는 뎁의 모습을 본떠 카멜레온 '랭고' 캐릭터를 만들었다. 강렬한 이목구비와 무심한 스타일로 세계인을 사로잡은 섹시 배우가 볼품없이 비쩍 마른 데다 거칠한 피부를 가진 카멜레온 랭고를 연기하는 것에 많은 사람이 호기심과 의구심을 동시에 느낀다.

주인공 랭고는 '돈키호테'와 같은 가짜 영웅이다. 그는 불의의 사고로 모하비 사막 한가운데에 떨어진 뒤 얼떨결에 사막의 무법자인 매를 죽이면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영웅 대접을 받는다. 보안관 자리까지 꿰찬 그는 영웅 노릇을 하기 위해 사막에서 고군분투한다.

'캐리비언의 해적' 시리즈를 만들어 전 세계 흥행에 성공한 감독이 왜 갑자기 카멜레온과 뎁을 주인공으로 한 서부극 애니메이션을 만들었을까. 국내 언론 중 단독으로 지난달 27일 프랑스 파리에 있는 버빈스키와 전화 인터뷰를 가졌다. 버빈스키는 미 UCLA에서 영화 연출을 공부하고 CF 감독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록밴드 기타리스트로도 오랫동안 활동했다.

―애니메이션은 처음인데 자신이 있었나.

"어렸을 때부터 애니메이션을 많이 보고 좋아했다. '캐리비언의 해적' 시리즈에서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많이 이용했기 때문에 컴퓨터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건 전혀 낯설지 않았다."

―랭고에서는 이모션 캡처(Emotion Capture) 기법을 처음 활용했다고 들었다. 시간과 노력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라는데.

"나는 배우들이 한군데 모여 연기를 하고 그걸 영화로 만드는 것밖에 몰라서 그렇게 했다. 오히려 다른 애니메이션들의 더빙 방식(배우들이 스튜디오 안에서 애니메이션 화면을 보고 녹음하는 방식)을 들었을 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모션 캡처로 의도한 효과가 있었나.

"애니메이션은 프레임마다 변화가 아주 많기 때문에 매 장면이 살아 있고, 거기에 직관이 담겨 있길 바랐다. 많은 배우가 한자리에 모이면 예측할 수 없는 사소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데 그 에너지와 생명력을 보존하고 싶었다."

―당신의 작품에는 '슈렉'의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귀여운 캐릭터가 하나도 없다.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며) 귀여운 건 지루하다. 스토리도 없고 그냥 만들어낸 캐릭터라는 게 뻔히 보인다. (랭고에 등장한) 귀가 하나밖에 없고 언제나 술에 취해 있는 토끼 의사는 대사도 별로 없지만 사연이 있어 보이지 않나. 이 영화의 캐릭터들은 영화 밖에서도 자기만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 같다. 원래 손톱 밑에 때가 많이 끼어 있는 캐릭터일수록 역사가 깊고 사연이 있다."

‘랭고’의 주인공 목소리를 맡은 조니 뎁이 카우보이 모자를 쓴 채 입에 막대기를 물고서 눈을 치켜뜬 모습이 영화 주인공 카멜레온 랭고의 옷차림과 표정에 그대로 반영됐다(사진 왼쪽). 오른쪽 사진은 손을 옆구리에 대고 다리를 밖으로 휘저으며 걷는 조니 뎁의 걸음걸이와 표정을 랭고가 그대로 하고 있는 장면.

―조니 뎁 배역이 왜 하필 카멜레온인가.

"겉으로 변화무쌍하지만 속은 헛헛한 캐릭터를 표현하는 데 카멜레온이 잘 어울린다. 그리고 그런 캐릭터는 뭐든지 연기할 수 있는 조니 뎁 같은 성격파 배우라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다."

―조니 뎁이랑 벌써 네 번째 영화다. 그가 당신의 뮤즈(muse·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인가.

"뮤즈라기보단 친구다. 사람들은 그를 무비 스타라고 하지만 그는 성격파 배우다. 이상하고 비(非)전형적인 캐릭터를 창조해 나가는 것을 재미있어 한다. 내가 그런 캐릭터를 좋아하니까 의사소통도 잘되고 죽이 잘 맞는다."

―랭고는 귀여운 캐릭터도 없고 주제도 쉽지가 않다. 어린이용이 아닌 어른용 아닌가.

"어린이들을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 내가 어렸을 때 즐겨 보던 '오즈의 마법사'도 사실은 아주 복잡한 영화다. 랭고를 보면서 여러 가지 깊은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그냥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인물을 그린 영화로 볼 수도 있다. 아들 둘(11세·15세)도 정말 좋아하더라."

3일 개봉. 전체 관람가

☞ 이모션 캡처(Emotion Capture)

보통 애니메이션 영화에서는 연기자나 성우가 녹음실에서 완성된 애니메이션을 보며 주어진 대사만 녹음한다. 이모션 캡처는 작업 순서가 이와 반대다. 버빈스키 감독은 스튜디오에 세트를 만들어놓고 배우들에게 역할과 비슷한 의상을 입도록 한 뒤 이들이 실사 영화를 찍는 것과 똑같이 연기하고 말하는 것을 HD 카메라로 찍었다. 24일간 찍은 이 영상을 편집해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표정·동작·말로 그대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