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그마한 체격의 이원주. 그러나 그로 인해 수많은 민다나오 원주민들의 삶은 훨씬 성장했다. 이원주는“내 가 그들보다 조금 나은 위치에 있으니 도울 뿐”이라고 말한다.

필리핀 수도 마닐라는 루손섬에 있다. 마닐라에서 비행기로 1시간 20분 거리인 민다나오. 루손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섬이자, 전 세계적으로 '반군의 섬'으로 악명이 높다. 남한 땅만한 민다나오섬에는 테러 관련 외신 뉴스에 등장하는 이슬람 반군 사령부가 있다. 바닷가 쪽 사람이 살 만한 땅을 두고는 이슬람과 가톨릭 세력이 툭하면 유혈 분쟁을 벌이고, 안쪽 정글엔 칼 차고 도끼 든 원주민들이 살고 있다. 한마디로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땅이다.

28년 전 필리핀 마닐라에 정착해 사업가로 크게 성공한 이원주(57)는 한 달에 꼭 닷새씩 마닐라에서 사라진다. 그가 가는 곳은 반군의 땅, 민다나오. 그는 독실한 불자(佛者)다. 하지만 그가 민다나오에 가면 원주민이 두 손 들어 반기고 반군이 로켓포를 메고 마중 나온다.

그가 민다나오 오지(奧地)에 만든 학교만 40개다. 돈만 대준 게 아니다. 원주민과 함께 철근, 모래 나르고 콘크리트 치며 함께 한칸 한칸 학교를 지었다. 완공된 교사(校舍)를 매달 순회하며 가방·연필·노트·스케치북·약품을 갖다주기 위해 이원주는 한 달에 5일씩 민다나오를 찾는다.

물론 이원주 혼자 한 일은 아니다. 국제구호기구인 사단법인 JTS(Join Together Society:이사장 법륜스님)의 지원을 받는다. 지부격인 'JTS 민다나오'를 창립하고 대표를 맡고 있는 자원봉사자가 이원주다. '증오와 갈등으로 점철된 민다나오에 희망을 심어주는 평화의 빛이자 사랑의 씨앗을 심는 인물'. 손상하 전 필리핀 대사는 기고문에서 이원주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설 연휴 전날인 2월 1일, 마닐라에서 이원주를 만났다. 부처처럼 환한 미소를 짓는 그의 첫마디는 "여기까지 뭐하러 왔소"였다.

◆이름도 몰라요, 나이도 몰라

―그럼 민다나오에는 왜 가셨소.

"불교수행모임 '정토회'를 이끄는 법륜스님이 2002년 막사이사이상(국제평화부문) 수상차 필리핀에 오셨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토니 대주교가 오랜 분쟁지역인 민다나오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을 법륜스님에게 자문했다. 불교 신자의 자격으로 스님을 수행해 민다나오를 처음 가 봤다."

―실상이 어떻던가.

"원주민 대부분이 글 모르고 셈을 못하더라. 한 원주민이 아바카(마닐라삼)를 등에 지고 5~6시간 산 넘고 물 건너 시장에 왔다. 약삭빠른 도매상이 물건 넘겨받고 원주민에겐 몇백원 쥐여줬다. 덧셈 뺄셈을 못하니 원주민은 주면 주는 대로 받는다. '그래도 좋다'면서 웃으면서 산으로 다시 올라가더라. 대대로 그렇게 살아온 거다. 마을 촌장에게 '몇 사람 사냐'고 물으면 '한 집에 7~8명 산다'고 대답할 뿐 통계란 게 없는 곳이다."

―문맹(文盲)도 심각한가.

"한 산간 지역에 48가구가 사는데, 글 아는 사람이 딱 두 명 있더라. 다들 나이도, 생일도 모른다. 누가 먼저 태어났는지 순서대로 기억해 위아래만 구분하고 지낸다. 그러다 외지인이 이사 오면 누가 아래·위인지 부락 전체가 헷갈려 버린다. 필리핀에선 흔히 이름을 줄여서 부른다. 글 아는 주민이 '토니'라는 남편을 둔 아주머니에게 '안토니오' 어디 갔느냐고 물었더니 '그게 누구냐'고 되묻더라. 주민 명부엔 본명이 '안토니오'로 되어 있지만, 부인도 10년씩 남편 본명 모르고 살아온 거다."

―그들은 뭘 먹고 사나.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고구마나 옥수수를 재배하거나 열매 따먹고 사냥을 한다. 과일·새·멧돼지 판 돈으로 옷이나 생필품 사는 정도다. 나무 기둥 4개 땅에 박고 나뭇가지나 풀을 덮은 집에 산다. 전기는 구경도 못하고, 식수가 부족해도 우물 팔 연장이 없는 곳이 태반이다. 지도에 없는 마을과 공무원이 한 번도 찾지 않은 곳이 더러 있다."

―원주민들 포악하지 않던가.

"처음엔 경계하지만 상대를 알고 나면 그런 순박한 사람들이 없다. 한번은 여러 번 갔던 마을에서 쌀을 구해 놓았더라. 처음 받는 '접대'였다. 밥이 나오기에 무슨 반찬이 나올까 하고 기다리는데, 원주민들이 교대로 방에 들어와 우리 얼굴 한 번 밥 한 번 쳐다보고 그냥 나가더라. 1시간 지나서야 돌돌 굴러다니는 그 설익은 쌀밥이 만찬의 전부란 사실을 알았다. 그래도 비싼 쌀 사려고 그 먼 시장에 나가 고구마 팔았을 생각하면 어찌 고맙지 않겠냐."

―당시 어떤 생각이 들던가.

"적어도 이들에게 글 깨우쳐주고, 더하기 빼기는 할 수 있게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문명인들에게 피해보고 살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나. 당시 법륜스님이 상금 5만달러 전액을 민다나오를 위해 내놓았고, 난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했다."

―무엇부터 할지 막막했을 텐데.

"우선 배울 곳부터 마련해야 했다. 처음엔 경계심을 풀어주기 위해 가톨릭 지역에 학교를 짓기로 했고, 이후 문명 혜택이 절대 부족한 원주민과 이슬람 반군 지역으로 옮겨가며 학교를 짓기로 했다. 산간 지역 대부분 학교가 없었고, 그나마 있는 학교도 비 오면 물 줄줄 새고 교실 바닥은 금세 뻘이 되고 말더라."

―산과 정글이 많아 자재 옮기기도 힘들었을 텐데.

"1인당 하루 소득이 1달러 미만인 곳을 찾다 보니 대부분 산간 오지에 학교를 짓는다. 비포장 도로라도 있으면 감사하고, 대개 도로에서 5시간 이상 떨어진 곳이 기본이다. 애부터 노인까지 길이 끊어지는 곳에 나와 철근, 벽돌 나르는 것을 돕는다. 어떤 때는 밤새도록 늪 같은 뻘밭을 걸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3㎏쯤 되는 흙이 신발에 붙어 올라온다. 뻘을 나르는 건지, 짐을 나르는 건지."

이원주는 기술자, 자원봉사자, 원주민과 함께 계속해서 민다나오에 학교를 지었다. 그는 아이들에게 책가방과 학용품 그리고‘내일’을 줬다(사진 위₩가운데). 로켓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민다나오의 반군들은 그를 가족처럼 맞았다.

―건축 자재가 마련된 뒤에는?

"현대식 건물 짓는 기술을 전수하고 공동체 생활을 통한 '협동'을 가르쳐주는 것도 JTS의 봉사 목적이다. 우리가 데리고 간 기술자와 자원봉사자, 원주민이 어울려 학교를 짓는다. 그 방식은 지금도 계속된다."

―그들이 금방 기술을 익히던가.

“초창기 한 마을에서 교실 바닥을 나무로 깔기로 했다. 원주민에게 일 맡기고 얼마 뒤 가봤더니 교실 바닥이 울퉁불퉁 가시밭이 되어 있더라. 바닥재로 쓸 판자를 정글도(刀)로 찍고, 쪼고, 다듬어 그 모양 된 거다. 당장 대패 사다줬다. 처음엔 신기해하더니, 이젠 대패질 잘한다.”

―민다나오엔 반군 통치 지역이 많지 않은가.

“그렇다. 필리핀에 이슬람 교도가 들어온 건 14세기쯤이다. 이후 17세기 마젤란이 필리핀에 오면서 가톨릭이 전파돼 지금까지 대세를 이뤘고, 19세기 말 미국 식민지 시대엔 기독교가 들어왔다. 이슬람 세력에 원주민이 쫓겨가고, 이후 이슬람 세력이 다시 가톨릭에 밀려 민다나오 산간지대로 들어간 것이다. 민다나오 인구 2000만명 중 이슬람교도는 이제 20%밖에 안된다. 하지만 민다나오 내륙에선 여전히 MILF(모로이슬람해방전선) 같은 강성 조직이 활동하고 있다.

―당신이나 JTS나 불교와 관련이 깊은데, 괜찮았나?

“아무리 보잘것없는 지역이라도 조직은 무서운 존재다. MILF는 이슬람 지역에 들어가기 전부터 우리를 관찰해왔고 신분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우리는 종교 얘기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고, 포교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학교 지어 아이 교육 도와주고, 교회든 이슬람사원이든 고쳐 달라면 마다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니 반군도 우릴 친구처럼 대하더라. 로켓포와 기관총 들고 마중 나오는 게 처음엔 섬뜩했지만 이젠 그 총 가지고 서로 장난친다.”

―그래도 분쟁 지역인데 때로 위험한 순간도 있지 않은가.

“우리와는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정부군과 반군 양측에서 허가를 받아 학교를 짓고 있는데 전쟁이 벌어져 공사가 중단됐다. 그런데 정부군들이 짓다가 만 학교를 사령부로 사용하는 게 아닌가. 비워달라고 해도 안 비켜준다. 정부 상대로 계속 방 빼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스무살 입학생이 있는 초등학교

―학교를 짓고 나서 운영은 어떻게 하나.

“건물이 완공되면 정부에서 교사를 파견해 아이들을 가르친다. 물론 초등학교 과정이다. 학교가 처음 생겼으니 입학생은 여섯살부터 스무살까지 다양하다.”

―책이나 학용품도 제공한다고 들었다.

“기존 학교를 살펴보니 선생님만 교과서가 있고 아이들은 한권도 없는 곳이 있더라. 정부에선 학생 몫까지 보낸다는데 중간에 어디로 사라진 거다. 그래서 직접 마닐라에서 교과서를 구입해 보내주고 있다. 연필, 볼펜, 지우개, 공책 같은 학용품은 1년에 두 차례, 책가방은 2년에 한 번 학교에 직접 갖다준다. 말라리아약, 구충제, 신발, 우의 등 챙겨줄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이들이 좋아하겠다.

“난리가 난다. 크레용 받으면 동네방네 다 칠하고 하루 만에 다 써버리는 애들도 있다. 교실에 탁상용 연필깎이를 놔뒀더니 한나절 그거만 돌리다 연필 한 다스를 몽당연필로 만들어 놓은 아이도 있고. 얼마나 재미있고 신기하겠냐. 그다음부턴 미니 연필깎이로 바꿔줬다. 절약도 배워야 할 덕목이다.”

―땅을 구입했다는데.

“재작년 민다나오 북기드논 지역에 50㏊(15만평) 정도 마련했다. 민다나오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필리핀 현지인의 생업을 돕기 위한 것이다. 별도로 4.5㏊ 부지에 원주민에게 농사 가르치는 직업훈련센터를 만들었다. 불도저, 굴착기, 트랙터, 경운기도 구입했다. 우리나라 새마을운동을 전파하는 교육장으로 보면 된다.”

―왜 그렇게 민다나오에 애착이 강한가.

“민다나오는 1970년 이전만 해도 울창한 밀림지역이었다. 지금은 큰 나무가 사라지고 민둥산이 됐다. 베어진 나무는 한국이나 일본 등으로 팔려나갔다. 과거 한국산 책·걸상, 가구 중에는 민다나오원목을 쓴 게 많다. 우리도 빚을 진 거다. 누구든 가서 원주민 실상을 봐라. 나만 애착을 갖는 게 아니다.”

―민다나오에서 봉사활동 하는 NGO가 많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우선 종교색을 가진 단체는 접근부터 어렵다. 미개발 지역이 많아 돈보다는 몸으로 부딪쳐야 하는 것도 생색내기 좋아하는 NGO들은 꺼리는 부분이다. 지금도 민다나오 내륙에 가려면 정부군과 반군의 허가를 모두 받아야 할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다.”

―필리핀 다른 지역도 돕는다고 들었다.

“민다나오를 알기 전인 1996년부터 필리핀 빈민을 좀 도와왔다. 화산 재해 입은 난민들도 지원 대상이다. 필리핀 대학·고교생에게 장학금도 주지만, 경제적 여유만 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대단한 건 아니다.”

―필리핀에서 훈장이나 표창을 주지 않던가.

“현지인들이 우리에게 애정 표하고 고마워하면 된 것이다. 봉사가 누가 알아달라고 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우리에게 줄 훈장 만들 돈 있으면 원주민에게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길 바란다.”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 않을까.

“그저 봉사와 보시(布施)일 뿐이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아프면 치료받아야 하고 배고프면 먹어야 하지 않나? 또 아이들은 배워야 하고. 기자가 그들이라면 치료받고 먹고 배우고 싶지 않겠나. 내가 그들보다 조금 나은 위치에 있으니 도울 뿐이다. 돈은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정직하게 열심히 벌어야 하고, 가치있게 마음 편히 써야 한다. 지금까지 아깝지 않게 썼고 앞으로도 잘 쓰려고 한다. 나를 민다나오로 이끌어준 법륜스님은 더 바쁜 분이다. 그러나 그분도 1년에 한 번 꼭 민다나오를 찾으신다. JTS 실무자나 다른 자원봉사자들도 모두 마찬가지다.”

◆‘폴로’를 이 사람이 만든다

이원주의 고향은 경남 고성이다. 이순신 장군이 승전보를 올린 당항포가 지척이다. 면서기였던 아버지와 농사짓던 어머니 사이에서 5남2녀의 넷째로 태어났다. 키가 작고(162㎝) 왜소한 체격의 그는 속앓이를 자주 했다. 위장에 뭐가 들었는지 직접 보고 싶어 의사가 되려고 했다. 고성종고 시절, 공부에 흥미가 없어 의대 진학은 포기했다. 부산에 있는 무역회사(조광무역)에 취직했다. 1980년 조광무역 해외법인 직원 선발에 지원했던 게 필리핀과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됐다. 30년이 지난 지금의 이원주는 마닐라 인근에 종업원 2000명을 거느린 ‘케이리패션’의 대표이다. ‘코리아’의 ‘케이’와 ‘이원주’의 ‘리’를 합성해 사명을 지었다. 여성 의류를 만들어 바나나리퍼블릭, 폴로 등 미국 브랜드에 전량 납품하는 이원주는 성공한 한인 기업인이다. 그는 지난해 말 12만 필리핀 교민을 대표하는 한인회장이 됐다. “그 사람이 감투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한인회 분열을 막기 위해 떠밀려 회장이 됐다”고 한인 기업인 김영기씨는 전했다.

―필리핀 간다고 했을 때 가족들이 말리지 않던가.

“당시만 해도 20대에 해외 가는 건 드문 일이었다. 아버지는 무한한 경험을 해보라고 했으나 어머니가 ‘결혼이나 하라’고 반대했다. 젊은 나이에 외국에 도전한다는 게 내겐 큰 꿈과 희망이었다.”

―정착이 쉽지 않았을 텐데.

“아이템 좋고, 시장 크고, 돈 있다고 사업이 되는 게 아니다. 일은 사람이 하는 거다. 지금 회사에 근속 20년 이상 현지인이 13명이다. 자금이 넉넉하지 않더라도 현지인을 내 사람으로 만들면 성공이 결코 어려운 게 아니다. 당시 필리핀 직원들의 영어소통 능력, 임금, 기술 등이 의류사업 하기에는 조건이 좋았다.”

―지금 회사 상황은 어떤가.

“미국에 전량 납품하다 보니 2008년 미국 금융 위기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4000만 달러 넘는 매출이 재작년 2800만 달러까지 떨어졌다. 작년에 조금 회복됐고, 조금 있으면 4000만 달러 아니라 5000만 달러도 할 수 있다고 본다.”

―결혼은 언제 했나.

“조광무역 필리핀 법인 근무 마치고 돌아온 1982년, 부산에서 아내를 만났다. 처음 만난 날 점퍼 차림으로 가서 필리핀 이야기만 늘어놓았는데 이게 집사람 마음을 끌었나 보더라. 잔업이 많아 데이트 약속 시간 제대로 지킨 적이 없지만, 아내는 늦더라도 반드시 나올 것이라고 믿고 항상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필리핀에 갔나.

“1983년 결혼 직후 나 혼자 다시 필리핀에 왔다. 조광무역을 퇴사하고 미국계 회사에서 3년간 일했고, 그 돈을 밑천 삼아 1987년 회사를 창업했다. 아내와 자녀들은 1985년 마닐라로 왔다.”

―자녀들도 다 컸겠다.

“아들 둘을 뒀고, 필리핀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쳤다. 첫째(28)는 미국 미시간대 졸업하고 병역특례업체 근무를 마치고 한국에서 영국계 회사에 다니고 있다. 둘째(26)는 뉴욕주립대를 나와 월가에서 애널리스트로 근무하다 지금은 강원도 전방 부대에 있다.”

―외국에서 오래 살았는데, 군복무 해야 했나.

“외국에서 계속 살고 있는 병역 대상자들은 35세까지 병역 의무가 보류됐다가 그 뒤 면제처분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한국인이라면 한국인의 의무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럼 군에 안 가도 되는데, 아들 스스로 군대 가겠다고 한 것인가.

“첫째는 대학에서 농구선수로 뛰다 어깨를 다쳐 철심 박은 것 때문에 한국의 병역특례업체에 근무했다. 둘째는 ‘안가겠다’고 펄쩍 뛰더라. 8개월간 아들을 설득했다. 특히 외국에서 자유분방하게 자란 아이들은 군대를 통해 한국인의 강인한 정신을 배워야 한다. 아비로서 평생을 버티게 해 줄 묘약을 자식에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안가도 되는데 왜 보내냐’며 뭐라 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아들 군 문제만큼은 내 고집대로 하고 싶었다.”

―결국 아버지가 이겼나 보다.

“둘째가 한국말이 서툴러 조금 걱정됐다. 필리핀에서 자라 추위를 잘 견딜 수 있을지도 신경 쓰였다. 7개월 전 철원에 배치돼 잘 지내고 있다. 지난번 면회 가니 서운해하는 맘 없이 그저 반가워하더라.”

―한인회장은 어떻게 맡게 되었나.

“세계 어느 한인회나 마찬가지이지만 내년 총선부터 재외국민에게 투표권이 주어진다. 지금까진 정치 문제로 교민들이 분열된 적이 없었는데 이제부턴 국내처럼 선거 전후로 극심한 후유증이 예상된다. 미국의 경우, 지역 한인회장 선거를 놓고 교민 사회가 벌써부터 혼탁해진다는 말이 들린다. 필리핀에선 작년 말 한인회장 선거가 있었는데, 원로들과 교민회 간부들이 ‘중립적으로 한인회를 관리할 적임자’라며 내게 출마를 권유했다. 몇 차례나 고사했는데 ‘분열 막아달라’는 요청에 어쩔 수 없이 선거에 나간 거다. 책임이 무겁다.”

―두 달 전 북한 연평도 포격 도발 때 교민 반응은 어땠나.

“한국 소식을 실시간으로 들었다. 전쟁으로 갈지, 이번에도 참고 말지, 우리 정부 대응이 초미의 관심사였다. 사건 사흘 뒤 한인회에선 규탄대회를 열었다. 한국국제학교에 200여명이 모였는데 그 자리엔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필리핀 노병들도 나왔다. 외국 나와 살아봐라, 다 애국자 된다. 전쟁 나면 싸우러 간다는 교민들도 많았다.”

―당시 필리핀 정부 분위기는 어땠나.

“한국 체류 중인 자국민이 6만명쯤 되다 보니 필리핀 정부에게도 연평도 사건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사태가 악화되면 일본을 통해 자국민을 신속하게 후송 조치하겠다고 하더라. 북한을 비난하는 성명도 내놓았다.”

―최근 우리 해군이 소말리아 해적을 제압하고 국민을 구했는데.

“휴전 이후 이런 쾌거가 있었나 싶다. 한국 내 국민 아니라 해외 교민들도 정말 뿌듯하게 생각한다.”

―한국이 부끄러웠던 적도 있나.

“1994년 성수대교 무너지고 다음해 삼풍백화점 주저앉고, 대형 사고가 줄줄이 발생했다. 필리핀 사람들이 ‘너희 나라가 ‘빨리빨리’ 행동해서 그런 거 아닌가.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고 하더라. ‘빨리빨리’가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되는 것 같다.”

―해외에서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 나라를 공부해야 한다. 그 나라 문화와 언어, 생활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외국 가서 한국 스타일, 한국 음식 고집하려면 그냥 눌러 사는 게 나을 거다.”

이원주와 마닐라에서 두 번 식사를 했다. 음식을 남긴 기자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면박을 줬다. 두 번째 자리에서도 음식이 남았다. 이번에는 식당 종업원이 알아서 손대지 않은 음식을 비닐에 담아 이원주에게 쥐여준다. “민다나오 원주민은 이런 음식 평생 가도 구경 못합니다.” 이원주가 민다나오를 바꾼 것인지, 민다나오가 이원주를 바꾼 것인지.

이원주 대표는

1954년 경남 고성 출생. 고성종합고등학교 졸업

1980년 부산 조광무역 필리핀 법인 직원으로 필리핀과 첫 인연

1987년 케이리패션을 세우고, 바나나리퍼블릭·폴로 등에 납품

2003년 JTS(이사장 법륜스님) 지부인 ‘JTS민다나오’ 설립, 민다나오에 학교세우기 시작.

현재까지 학교 40곳 건립, 운영 지원

2010년 필리핀한인회 회장으로 선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