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규상(69)씨는 그저 한평생 우산 만드는 기술자라는 것을 천직으로 알며 살고 있는 장인이다. 종이우산을 만드는 윤씨를 찾아 전북 전주시 인후동 집을 찾았을 때, 그는 우산에 관해 수록된 자료를 한가득 내어 놓았다.
그중에서도 산유희(傘遊戱) 소리가 눈에 들어왔다. 산유희란 여러 우산을 소재로 지은 노래들로 일산무, 우산무, 대활산무 등의 반주들이 음악으로 쓰이고 있다. 현재 경기도 안성의 향당무(鄕堂舞) 중에는 일산무가 무형문화재로 지정 되어 있다. 바로 그들이 윤씨의 얼마 남지 않은 고객 중 하나다.
태평산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파산(破傘)소리란 놀이춤 내용엔 이런 것도 있다.
우리 인생사가 우산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것이다.
1941년 전북 완주군 용진면 삼삼리에서 목수 윤덕용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윤규상은 16세에 이웃 장재부락의 한 우산공장에 견습공으로 입사하면서 우산과 인연을 맺었다. 어린 나이에 대나무를 쪼개거나 다듬는 일은 매우 고단해 약한 윤규상의 두 손엔 대나무 가시에 찔린 핏살 흔적이 가시질 않았다.
그러나 윤규상은 2년여 만에 그만뒀다. 승급기간이라는 2년 동안 급료도 한 푼 받지 않고 열심히 일했음에도 주인이 약속을 지켜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근의 엄주학씨의 우산 공방으로 옮겨 앉았다. 윤규상에게 있어선 이곳이 우산장이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이곳에서 우산에 대한 기술을 완벽하게 습득한 윤규상은 25세 때 전주에서 독립했다. 당시 10여명의 기술자를 채용한 그의 공장에선 한 달에 보통 3000여개의 우산이 생산되어 전국으로 팔려나갔다. 1960년대엔 전주시 우아동 장재부락을 비롯, 우산공장이 35개 처였으나 현재는 그의 공방 단 1개만 남았다.
지금은 그가 주인이자 기술자이며 아내 김영님이 유일무이한 조수 겸 허드렛일을 거들어 주고 있다. 직장 다니는 장남 윤성호도 휴일이면 부친을 돕는다.
중국에서는 당·송 시대에 종이우산이 보편화되어 일반 백성들도 사용했으며 지금과 같은 박쥐 형태의 우산은 18세기 중반 영국의 J 한웨이가 발명했다고 기록됐다.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시대 영조(英祖) 9년(1733년) 임금이 말하기를 '인군(人君)이 문을 나서면 반드시 일산을 벌리고 동궁(東宮)이 일산을 벌리므로… 어가(御駕)를 움직일 때는 비록 우산을 쓰더라도 늘 쓰는 일산은 명주로 만드는 것이 옳은 것이니…'라고 실록에 기록되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가 한국에서 우산이 사용된 역사로 추정하게 된다.
중국인들은 1930년대 접었다 폈다 하는 종이우산을 만들어 사용했고 우리나라엔 1950년대 중반 지우산(紙雨傘)으로 불리며 돈푼깨나 있는 집안에서만 사용됐던 것이 종이우산이다.
우산 제작에 사용되는 대나무는 3년생이 최고다. 한지 위에 들기름을 끓여서 매겨 사용한다. 쇠 젓가락 넓이의 대나무를 얇게 반으로 쪼개어 실구멍을 낸 뒤 우산살을 만드는데 우산 크기에 따라 32·36·72개를 사용하여 만들어낸다.
가장 큰 규격은 72개의 살을 넣고 제작한 우산으로 참으로 우아하고도 멋이 있다. 지난 12월 서울 공예문화진흥원 전시장에서 팔려나가기도 했다.
근래엔 우산 주문이 없어 그는 디자인 연구에 나날을 보내고 있다. 손잡이를 오죽(烏竹)으로 사용해보기도 했는데 값이 비싸 일반 대나무를 불에 그을려 검은색을 내어보기도 하지만 역시 자연 그대로인 오죽보다 못하다. 가끔은 영업집에서 실내장식용으로 주문을 해올 때면 윤규상은 신이 난다.
한지에도 울긋불긋 색상을 입혀본다. 자칫 간드러지게 멋을 내다보면 일본풍 우산처럼 보여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다.
우산 제작에 가장 힘들고 어려운 부분이 우산살과 연결되는 우산 꼭지다. 주로 대죽나무에 우산살이 끼워지도록 깊이를 조정해주는 우산꼭지는 외부 공장에서 제작하여 납품을 받았는데 우산수요가 줄어들자 우산 꼭지 공장도 문을 닫게 되었고 이제는 그가 직접 만들어내야만 한다. 우산꼭지 만드는 일이 우산 전체를 만들기보다 더 힘들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
경기가 좋을 때 2000~3000개씩 만들어내던 우산이 된서리를 맞은 건 70년대 비닐우산이 나오면서. 헝겊우산, 수입우산이 시장을 점령하면서 한국 전통 종이우산 시대는 막을 내려야만 했다. 그도 한때는 뜨개 바늘을 만드는 일도 해봤지만 그 일도 오래가질 못했다. 우산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 때문이다.
그동안 우산을 만들어 돈은 벌지 못했지만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이나 '전주 전통공예대전'에 출품하여 상도 받았고 얼마 전엔 서울 인사동의 '한국공예 디자인'재단의 특별 초대를 받아 전시를 하였으며 지난 8월엔 전주시 자매도시인 일본 가나자와시와 한지문화진흥원 교류전에 초대되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우산장인 윤규상의 희망과 꿈은 한국 종이우산의 기술이 단절되지 않고 오래오래 전승되는 것이다. 윤씨는 "우산이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없다면 향토성과 기능의 희귀성에 그 의미를 부여해 전북 무형문화재로 지정이라도 된다면 후계자가 나설 수도 있겠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내핍생활.' 물자가 너무 풍부해 내다버리는 것이 습관화되어버린 현대인들에겐 생소한 단어이지만 언젠가는 또 가난, 불황, 공황이 닥쳐올 때를 생각해서 우산 만드는 장인들이 즐겨 불렀던 판놀이 한 대목을 남겨두고 싶다.
얼마 전 한국을 찾아 '글로벌 패션 포럼'에서 기조연설을 한 외국 전문가가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한국에도 수공예품을 만드는 장인들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