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북한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가 우리측에 '무조건 대화'를 제안한 것은 "천안함·연평도 사건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의미"(안보부서 당국자)란 분석이다. 조평통은 이날 "대화의 문을 열기 위한 선의의 조치"라며 판문점 적십자 채널 재개통과 개성공단 경제협력협의사무소 동결 해제를 발표했다. 이는 지난해 천안함 폭침 직후 우리 정부가 취한 5·24 대북 제재와 관련 있는 내용들이다. 당시 조평통은 우리측의 5·24 조치에 맞대응해 "이명박 패당의 임기 기간 당국 대화와 접촉을 하지 않겠다"며 ▲적십자 연락대표 사업 중지 ▲남북 간 모든 통신선 단절 ▲개성공단 경협협의사무소 폐쇄 ▲남한 선박·항공기의 북한 통과 전면 금지 등을 선언했다.
조평통의 8일 담화는 작년 5월 자신들의 대남 강경책을 뒤집은 것이다. 또 조평통은 8일 "1월 말 또는 2월 상순 적십자·금강산관광·개성공단 회담 개최"를 제안했는데 금강산관광·개성공단 회담은 천안함 사건 이후, 적십자회담은 연평도 포격 이후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북한이 지난 1일 신년 공동사설에서 "북남 대결 해소"를 언급한 이후 야금야금 '대화 공세'의 수위를 높이는 것과 관련, "실제 대화가 열리든 열리지 않든 북한으로선 손해 볼 게 없는 상황"(유호열 고려대 교수)이란 분석이 많다. 우리가 대화에 머뭇거리면 북한은 우리 정부에 '강경'이란 딱지를 붙일 수 있다. 이는 북한이 무슨 짓을 해도 우리 정부의 '대북 강경책' 탓으로 돌리는 좌파 세력들에게 도움이 된다. 특히 미국·중국 등이 6자회담 재개의 전제조건으로 남북관계 개선을 내걸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은 '대화 공세'만으로도 6자회담을 위한 '명분 쌓기'가 가능하다. 외교 소식통은 "오는 19일 미·중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문제가 비중 있게 다뤄질 전망인데, 북한의 대화 공세는 북한 편을 드는 중국에게 유리한 국면을 만들어 줄 것"이라고 말했다. 천안함·연평도 도발 이후 국제사회의 대북 비난도 살짝 피할 수 있다.
반면 우리측이 대화를 수용할 경우, 북한은 김정은 후계체제 안정에 필수적인 경제적 지원을 얻게 된다. 실제 8일 조평통이 제안한 것은 인도적 물자지원을 논의하는 적십자회담과 현찰을 챙길 수 있는 금강산관광 및 개성공단 회담이었다. 북한은 지난 10년간 금강산에서 5억달러가 넘는 돈을 챙겼고, 개성공단에선 매년 5000만달러를 벌고 있다. 김일성대 교수 출신인 조명철 박사는 "북한이 추구하는 남북대화의 핵심은 경제난 해결"이라고 말했다. 대북 소식통은 "북한이 작년에는 군량미 창고를 열어 춘궁기를 넘겼지만 올해는 이마저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했다.
우리 정부는 갈수록 수위가 높아지는 북한의 '대화 공세'와 관련, 천안함·연평도 사건에 대한 "북한의 결자해지(結者解之)가 먼저"(통일부 당국자)란 입장이다. 8일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의 구체적인 대화 제의에 대해 통일부가 "아직 진정성에 문제가 있다"고 밝힌 것도 천안함·연평도 도발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5일 '연합성명'과 달리 천안함·연평도 도발의 책임을 우리측에 돌리지는 않았지만 "침묵이 책임 있는 태도는 아니다"(안보부서 당국자)는 판단이다.
정부가 북한의 '대화 진정성'을 계속 의심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정부 소식통은 "우리측이 북한에 대화하려면 천안함·연평도 사건에 대한 유감 표명 등이 먼저 필요하다는 통지문을 보내거나 남북대화에서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을 포함한 북핵 문제를 논의하자고 '역제안'하는 방안 등을 검토하는 것은 북한의 진정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특히 이명박 정부는 북한이 대화를 제의해놓고 뒤통수를 때리는 수법에 여러 번 당한 경험이 있다. 작년 초까지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기대가 부풀었지만 북한은 3월 천안함을 폭침시켰다. 또 작년 하반기 이산가족 상봉과 적십자회담 등으로 남북관계가 풀릴 조짐이 보였을 때 북한은 연평도 민가에 포탄을 퍼부었다.
이번에 정부는 천안함·연평도 사건 및 핵 문제에 대한 북측 태도에서 대화 진정성을 읽겠다는 입장이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남북 대화의 본령은 비핵화이고, (남북관계) 최대 현안은 천안함·연평도 사건"이라며 "남북대화가 재개될 경우 천안함·연평도 문제와 함께 비핵화라는 핵심적 의제가 논의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 북한의 대화 공세는 대화 본령인 비핵화 문제와도, 최대 현안인 천안함·연평도 사건과도 별 관계가 없는 수준이란 판단이다. 북한이 이산가족 상봉 등 남북 상호 간 부담이 적은 인도적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적십자회담을 먼저 제의하고 남북이 이를 협의하는 과정에서 천안함·연평도 사건에 대한 북측 입장이 정리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관측도 나온다. 북한은 남북정상회담 비밀 접촉이 진행되던 2009년 10월 개성공단에서 열린 임진강 수해방지 실무회담에서 북한의 임진강 댐 무단 방류로 우리 국민 6명이 사망한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 적이 있다.
현재 정부는 당장 남북대화를 추진하기보다 이르면 이번 주부터 시작될 유엔 안보리의 UEP 논의 동향과 6자회담 재개 분위기, 19일 예정된 미·중 정상회담 일정 등을 감안해 대응책을 마련한다는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