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성목(65)씨는 자신을 꼭 한 번 만나달라고 했다. 그가 집요한 사람임을 직감했다. 망설이다가 나는 강릉으로 갔다. 그가 재작년과 작년에 위암 수술을 받았고, 또 대장암 수술까지 받고서 몇 달 전 재발했다는 말을 전해듣고서였다.

"내게는 평생 친구도 없어, 애인도 없어요. 오직 축음기밖에 없어요. 기기를 수집해온 게 내 인생이고 철학입니다. 미국을 150회나 다녔지만 난 미국 지리를 전혀 몰라요. 축음기만 수집해 얼른 돌아올 뿐이지요."

그는 경포 호수변에 위치한 '참소리 축음기·에디슨 박물관'의 관장이다. 안으로 아직 들어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박물관의 '전율(戰慄)'을 전할 수 없다. 수집 규모의 수치로만 설명될 것이다. 축음기 3500대, 에디슨 발명품 2000점, 영사기 500대, 음반 10만장 등등…. "미국 사람도 에디슨을 만나려면 강릉으로 와야 한다" "에디슨의 본적은 미국이지만 에디슨의 주소는 이곳"이라는 말도 듣는다.

한 개인이 혼자서 양과 질에서 이렇게까지 모은 경우는 없었고 없을 것이다.

"이걸로는 부족해요. 요즘은 영화박물관을 하나 더 짓는 것을 생각해요. 바깥 컨테이너에 영사기들이 꽉 차 있어요. 대부분 100년 전의 것들입니다. 이 중에는 영사기 하나 무게만 1t짜리가 있어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필름과 영사기도 30만달러에 사놓았습니다. 문제는 건축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느냐, 난 날마다 서너 시간밖에 못 잡니다. 죽어서 저승에서도 박물관을 또 할 거요. 난 할 수밖에 없지."

주위에서는 그의 열정을 이야기했지만, 나는 집착(執着)과 물욕으로 의심했다.

―무소유(無所有)의 삶까지 논할 바는 아니지만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좀 버리면서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어쩌다 축음기 소리에 이끌려 여기까지 왔어요. 밤에 잠이 안 오면 기기를 뜯어고치고, 바닥에 나사가 하나 떨어져 있어도 그게 어느 부품인지 금방 압니다. 비록 100년 전의 것이라도 모두 작동되고 소리가 나요. 난 완벽한 것을 좋아합니다. 이게 내 삶입니다. 내가 미친놈이라는 건 맞아요. 걸어온 이 길을 내게 다시 걸으라면 못 걸어요. 이왕 가는 길이니까 계속 끝까지 가는 겁니다."

―이렇게 계속 모은다는 것은 어쩌면 사물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아닐까요?

"에디슨은 발명을 위해 300년을 살고 싶다고 했지. 그는 아이디어가 많아서 항상 바쁘고 세월이 짧았어요. 난 500년을 살고 싶다고 합니다. 아직 수집할 게 그렇게 많아요. 지금도 엄청나다고 하겠지만 전시품을 계속 업그레이드를 시켜줘야 해요. 박물관도 새로운 수집을 멈추면 퇴보합니다. 돈이 조금만 여유 있어도 더 잘 해보겠는데…."

―여기 수집품을 돈으로 환산하면요?

"돈 1000억원쯤 되겠지요."

―그것밖에 안 됩니까?

나는 당당하게 물었다.

"그게 적은가요?"

―그러면 돈 1000억원을 주면 넘겨주겠습니까?

"그건 절대 안 되지요."

그가 수집에 빠지지 않았다면 거부(巨富)가 됐을지 어떨지는 모르나, 지금처럼 부인을 시켜 돈을 빌리는 사태까지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80년대 초 정부의 임대아파트 공사를 맡아 한 채를 지으면 최소 200만원씩 남겼다. 그걸 500세대 이상 지었고, 레미콘 사업에도 뛰어들어 돈을 쓸어담았다.

"이게 노다지였습니다. 이 돈으로 기기를 수집하는 데 바빴지요. 아버지가 남긴 막대한 부동산도 다 팔았어요. IMF 때 사업을 접고 박물관 일에만 매달렸어요. 나는 진기한 물건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안 사고는 못 배깁니다. 직원들 급료를 한 달 늦게 주더라도 꼭 사야 해요. 그렇게 미쳤어요. 지금까지도 은행 대출을 받고 아내를 시켜 이웃에 꾸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무슨 돈으로 이렇게 다 모을 수 있었을까 의문은 풀리지 않습니다.

"물건을 살 때 한 번에 현찰을 다 주지 않아요. 송금 액수 제한이 있다는 이유로 분할 상환하니, 박물관 입장료 수입을 모아 보내 줄 때도 있어요. 실은 IMF 때 레미콘 사업이 파산하는 바람에 에디슨박물관이 압류된 적이 있었어요. 경매에 부쳐지기 직전에 되찾았습니다. 아직 부채가 남아 있어요. 현재의 박물관 건물은 강릉시에서 지어줘 매년 1억원씩 임대료를 내고 있어요."

그는 원산에서 백화점과 양복점을 하던 집안에서 출생했다. 다섯 살 때 모친이 여동생을 출산하다가 숨졌다. 삼대독자인 그는 바깥을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를 달래기 위해 부친이 포터블 축음기(콜롬비아 G241)를 선물했다. 이는 그의 수집품 1호로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1ㆍ4후퇴 때 "전쟁통에 그게 밥을 먹여주느냐"고 부친이 야단을 쳤지만, 여덟 살인 그는 이 축음기를 지고 남으로 내려왔다.

사업 수완이 좋은 부친은 월남 후 운수업을 했고, 이어 부동산업에 뛰어들어 큰돈을 모았다. 아들에게 강원도 고성 땅 3만평에 목장을 지어주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 길은 달랐어요. 이미 중학교 때부터 고장났다고 버린 축음기를 고쳐 쓰고, 동네 전파사를 돌며 여러 축음기를 모은 것만 10여대가 됐어요. 학교 친구들에게 자랑하려는 마음이 있었지만, 나중에는 축음기마다 다른 소리가 나오는 게 신기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부친이 해주겠다는 목장 대신 '전파사 가게를 얻어달라'고 했어요. 강원도 동해에 전파사를 했습니다. 그때 월남전이 터져 미군용 축음기들이 파병 장병을 통해 막 들어왔어요."

결혼을 한 뒤 그는 한라건설에 입사해 5년간 자재부 차장으로 중동 근무를 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사장이던 시절이었다. 그는 바이어들이 뒷돈을 주려고 할 때 '대신 축음기를 모아달라'고 했다고 한다. 새로운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나올 때라 축음기가 중고품 시장에 쏟아지고 있었다. 동료 직원들의 귀국 편에 물건들을 부쳤다. 그 시절 이미 600여점이 됐다. 귀국 후 임대아파트 건설업을 하면서 그는 박물관을 짓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본격적인 수집에 나선 것이다.

손성목 관장은 "나 같은 놈이 있어 사람들은 에디슨이 처음 만든 커피포트를 눈으로 본다"고 말했다. 옆의 사진은 에디슨.

―구입 정보는 어떻게 입수합니까?

"임시선원증을 만들어 동해에서 출발하는 화물선을 타고 일본에 간 적도 있어요. 정보가 없으니 가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영국의 소더비 경매장에 가게 됐어요. 쌓인 물건을 보고 얼마나 마음이 들떴는지 모릅니다. 세계의 수집상들이 모여 있었어요. 여기 와서 수집하는 한국 사람은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수집상들끼리 거래를 합니다. 이들은 차익을 남기기 위해 수집을 하니까요. 외국의 민간박물관도 가격만 맞으면 사고팝니다. 나처럼 사서 오로지 쌓아놓는 전문 수집가는 없습니다."

―박물관 안에는 에디슨 발명품인 배터리 차가 있더군요.

"저 차는 지금도 굴러다닐 수 있습니다. 요즘 전기자동차의 원조입니다. 에디슨은 세 대의 배터리 차를 만들었어요. 미국의 에디슨박물관과 포드자동차박물관, 그리고 나머지 한 대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겁니다. 15년 전 미국의 한 수집상에게서 샀지요."

―당초 축음기를 수집하다 어떤 계기로 에디슨 발명품까지 손을 댔습니까?

"미쳐서 축음기를 수집하는데, 외국 친구가 '에디슨 것도 같이 해야지. 축음기는 에디슨이 처음 만들었는데' 하는 겁니다. 아차 했어요. 그때부터 에디슨에 빠져들었습니다."

에디슨이 만든 세계 최초의 축음기 '틴 포일'(1877년)은 주석 포일을 감은 원통을 돌리면서 진동판에 말을 하면 바늘이 포일에 홈을 내며 소리를 기록한다. 에디슨은 '메리의 어린 양'을 직접 불러 여기에 녹음했다. 에디슨이 만든 총 여섯 개의 '틴 포일' 중 다섯 개를 그가 수집했다.

―미국 사람도 아닌 사람이 에디슨 발명품을 모두 끌어모은 것은 정말 유별납니다.

"미국 관람객들이 와서 '이런 전시품이 왜 여기에 있나'하고 때로 의아해합니다. 영국의 대영박물관에는 자기 나라 유물은 없고 다른 나라에서 빼앗아온 것뿐입니다. 하지만 나는 정식으로 돈을 주고 사서 잘 보존하고 있어요. 내게 골동품을 판 텍사스 갑부는 '자식한테 물려줘 봐야 어디에 처박아 놓을 테고 당신은 잘 보존할 것 아닌가' 말했습니다. 나 같은 놈이 있어, 사람들은 에디슨이 '커피포트'를 처음 만들었다는 사실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에디슨이 처음 만든 탄소 필라멘트 백열전구에는 지금도 빛이 들어옵니다. 내가 돈을 벌려고 했으면 이런 물건을 팔아서 호의호식했겠지요."

―에디슨이 발명했다고 전해지는 '유령탐지기'를 구입하려고 한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빔프로젝트와 광전자 센서를 이용해 자신의 임종 순간에 유령을 보기 위해 설치했으나 실패했다고 하더군요.

"이는 지난여름 어린이용 뮤지컬로 제작됐어요. 내가 관객인사도 했지만, 사실 그런 것은 없어요. 소문에 불과한 것입니다."

―에디슨이 임종 순간 마지막으로 내뱉은 '숨'을 담은 유리관은요?

"그 유리관은 디트로이트의 포드박물관에 있어요. 어디 에디슨의 입김이 지금 남아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걸 수집하는 게 내 꿈입니다. 그 박물관에 '너희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제안해놓았습니다. 언젠가는 내가 꼭 사들일 겁니다."

그는 '아메리칸 포노그래프'(동전을 넣고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축음기)를 수집하러 아르헨티나로 가던 중 강도를 만나 목숨을 잃을 뻔했다. 1900년 미국에서 여섯 대를 제작했지만 한 대만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는 몸을 숙이며 "견갑골을 만져보라"고 했다. 자신의 수집 열정에 대한 증표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실 겁이 나 수집을 그만두려고 한 적이 몇 번 있었어요. 하지만 박물관 전시품들이 내게 말하는 걸 듣습니다. 혼자서 가만히 귀 기울이면 '배짱과 집념이 없이 무슨 세계적인 박물관을 하느냐'는 말이 정말 들려요. 사업이 부도나 채권단이 들이닥치고 가재도구에 빨간 딱지가 붙은 적이 있었어요. 그날 새벽 두 시에 미국에서 경매가 있었어요. 옆 방에서 몰래 현지 대리인에게 전화로 구매지시를 했습니다. 이 장면을 아내에게 들켰어요.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아무리 미쳐도 이렇게 미친 사람은 처음 봤다'고 울어요. 그런데 이렇게 미쳤으니 오늘날까지 살아왔던 게 아닐까요."

―사람은 어차피 죽게 마련이고, 이렇게 모은 걸 남겨놓고 아까워서 어떻게 눈감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죽으면 '새로 지은 박물관 아래에 묻어달라'고 했어요. 그게 소원입니다. 내 인생은 박물관밖에 없어요. 박물관 운영 재단을 만들어 자식들이 수집품을 못 팔도록 할 작정입니다. 내가 수집한 것은 내 것이 아니라 결국 우리 사회의 재산이 되겠지요. 자식들은 박물관 운영자로서 밥벌이를 할 수 있으니 별로 불만이 없을 겁니다."

소유와 무소유, 집착과 열정이 그에게 엇갈렸다. 다만 크게 미치지 않고는 이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박물관 입장료는 7000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