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에 눈을 뜨다
해리 크라이슬러 지음|이재원 옮김|이마고|371쪽|1만6000원
이 책의 저자는 학자라기보다 학술 기획자다. 현직이 미국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국제관계연구소 상임이사인 점도 그렇지만 1982년부터 30년 가까이 전 세계 정치·사회운동·학문·문화예술계의 저명인사 480여명을 인터뷰해 생방송 하는 인터뷰어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책은 그가 그동안 인터뷰했던 인물 중에서 현재의 세계를 대변하고 표상할 만한 학자와 지성인, 사회운동가 20명을 선정하여 그들과의 대담을 글로 풀어쓴 것이다. 사상가를 인터뷰한다고 해서 고담준론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의 연관 속에서 예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그의 매력이다.
시작은 미국의 언어학자이자 좌파운동가인 노엄 촘스키다. 저자가 모든 대담 상대자에게 던지는 질문, "선생님의 세계관이 형성되는데 부모님이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십니까?"에 대해 촘스키는 급진적 행동주의 성향을 가졌던 어머니의 가족을 언급한다. "외가 쪽에서 저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은 이모부였습니다." 장애인이었던 이모부는 뉴욕 빈민가 출신으로 공부도 초등학교 4년이 전부고, 직업은 신문팔이였다. "이모부는 제가 만나본 사람들 중 가장 학식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독학으로 그렇게 되신 거죠."
20명의 명단에는 베트남전 당시 '국방부 문서' 폭로를 통해 반전(反戰)운동을 이끈 대니얼 엘스버그, 이슬람 여성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이란의 인권 변호사 시린 에바디, 남아공의 인종 차별 철폐를 위해 투쟁한 판사 앨비 삭스, 노벨 문학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 진보 성향의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쓴 음식운동가 마이클 폴란 등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인물들이 들어 있다.
저자가 대담에서 추구하는 목표는 하나다. 어떤 계기로 그 일에 뛰어들어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는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오에 겐자부로에게 던진 질문. "선생님은 스스로를 '주변부 작가'라고 불러왔습니다. 어느 정도는 선생님의 출신과 관련 있는데, 그것 이상을 의미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오에의 답. "우리의 아주 뛰어난 동료들은 일본이 아시아의 중심,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저는 언제나 제가 주변부 작가라고 말합니다. 일본의 주변부인 작은 섬 출신, 아시아의 주변부인 일본 출신, 이 지구의 주변부 나라 일본 출신이라고요. 저는 자부심을 갖고 말합니다. 문학은 주변부에서 중심부를 향해 쓰여야만 하며, 우리는 그 중심부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자는 예외적으로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에 대해서는 첫 질문부터 본질적이다. "훌륭한 영화를 만드는 비결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대답이 예술이다. "영화감독은 프랑켄슈타인 박사입니다. 훌륭한 감독이라면 말이죠. 이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자신이 마련한 화학실험실에서 모든 사람이 최상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만들어야 되죠. 최고의 촬영기사, 최고의 디자이너, 최고의 배우, 최고의 각본 그리고 약간의 실수가 필요합니다."
2003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시린 에바디와의 대담에서 눈에 띄는 질문은 "선생님의 용기는 어디서 비롯되는 겁니까?"이다. 에바디는 이렇게 답한다. "자신이 걷는 길이 정당하다는 걸 믿는다면 더 힘차게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습니다. 용기는 자신감에서 비롯됩니다. 자신의 결정이 옳다고 확신하면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될 겁니다. 용기가 부족한 사람들은 종종 자신들의 결정이 옳은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확신이 충분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짓궂은 질문 하나 없이 담담하고 어찌 보면 평범한 질문들이 이어지는데도 대담이 풍성한 것은 초대된 인물들의 삶이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런 요소들을 이끌어낸 원동력은 저자가 상대방을 그만큼 탐구하고 준비한 데도 있다. 오랜만에 보는 명품 대담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