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헌조(李憲祖·78) 전 LG전자 회장이 지난 8월 말 한국 실학(實學) 연구에 써달라며 학술연구단체인 '실시학사(實是學舍)'에 사재(私財) 70억원을 기증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실시학사는 국학(國學) 분야 원로인 벽사(碧史) 이우성(李佑成·85) 퇴계학연구원장(성균관대 명예교수)이 1992년 설립, 후학들과 함께 실학의 핵심정신인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연구·실천하는 학술단체다. 2005년 11월 다산학(茶山學) 연구의 중심 역할을 한 공로로 제6회 다산학술상 대상을 받았고, 1995~2002년 다산의 서문·발문·편지글 등을 추출해 우리말로 옮긴 '다산경학자료역편' 5권을 출간했다. 지난해 2월에는 이들을 포함한 중견학자 24명이 7년에 걸쳐 번역 및 주석 작업에 매달려 '역주(譯注) 시경강의'(사암·전 5권)를 완간했다.
이 전 회장과 이우성 원장은 1980년대 중반부터 20년 넘게 한 달에 한 번씩 한시(漢詩)를 짓는 모임인 '난사(蘭社)'에 참여하고 있다. 조순 전 부총리, 김용직 서울대 명예교수, 이용태 전 삼보컴퓨터 회장, 고(故) 김동한 전 대한토목학회장 등이 회원이다.
이헌조 전 회장은 이우성 원장으로부터 비용 문제로 올해 말 실시학사를 접으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실력 있는 학자들이 모여 순수 인문학을 연구하는 단체가 재정상의 이유로 사라지는 게 너무 안타깝다"며 거액을 내놓았다. 이 전 회장으로부터 현금 50억원과 주식 20억원어치를 넘겨받은 실시학사는 곧바로 '재단법인 실시학사'를 설립했다. 재단 이사장은 이 전 회장이 "기부자로 끝내야지 주인 역할을 하려 해선 안 된다"며 고사하여 역시 난사(蘭社) 회원인 이종훈 한국전력 이사회 의장이 선임됐다. 실시학사는 "다산 정약용, 성호 이익, 연암 박지원 등 주요 실학사상가들의 정치·경제·사회 사상을 전문적으로 연구할 연구자 25명을 위촉했다"면서 "기증받은 돈은 이들을 위한 연구비와 저서 발간비로 쓸 계획"이라고 밝혔다.
서울대 철학과 출신인 이 전 회장은 1957년 락희화학공업에 입사했으며, 1976년 국제증권 사장을 시작으로 1996년 LG전자 회장에서 퇴임할 때까지 20년 동안 LG그룹 주요 계열사 CEO(최고경영자)로 활동했다. 이 전 회장은 전화를 받지 않고, 측근을 통해 "한학(漢學)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나라 인문학 발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다. 기부 사실이 알려지는 것도 원치 않으니 기사를 싣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