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을 만나보기로 작정한 건, 두 가지 궁금증 때문이었다.
첫째, 일본에 한국 영화를, 한국에 일본 영화를 소개하면서 꽤 잘나가던 그가 왜 그렇게 '망했는지', 둘째, 일본 조총련계가 설립한 조선학교를 초등과정부터 대학까지 나왔는데, 그에게 한국이란, 북한이란 어떤 나라인지.
이봉우(50)는 얼마 전까지, 일본 영화제작회사 씨네콰논의 대표였다. 한국 영화를 일본에 본격적으로 알렸다. 그는 '조선 국적자' 신분으로 93년 한국을 찾아와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를 파격적 가격인 25만달러에 사 가 일본 사람들에게 보여줬다. 또 '쉬리'나 '공동경비구역JSA'를 당시 최고가인 100만달러에 수입해 '대박'을 쳤다. 일본 사람들이 "한국에도 영화가 있느냐"고 빈정거렸던 시절이었다. 그는 이런 공로로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공로상을 받았다.
그는 일본 영화계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제작자 중의 하나다. 칸 영화제 최초로 아역배우가 남우주연상을 받은 '아무도 모른다'를 비롯, 탄광촌 댄스팀의 이야기 '훌라걸스', 60년대 조선학교 재학생의 슬픈 청춘담 '박치기' 등 그가 제작한 영화는 일본 평단의 열광을 얻어냈다.
흔한 성공담에 지쳤나. 그는 연초 일본 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부산영화제를 찾은 그를 11일 만났다.
―회사가 지금 어떤 상태인가.
"8개월간의 심사를 거쳐 지난 9월 22일 민사재생법의 신청이 받아들여졌다. 내가 씨네콰논 경영에서 물러나는 대신 회사는 부채를 줄이는 회생과정에 들어가는 것이다."
―당초 빚이 47억엔이라 나오던데, 왜 그렇게 빚을 졌나.
"씨네콰논에 영화 제작배급사, 극장(13개관), 레스토랑 등 다양한 사업체가 있었고 매출도 연간 40억~50억엔이 됐다. 2006년 명동에 연 극장 사업이 잘못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나한테 극장을 임차한 사람이 건물을 경매에 넘기는 바람에 40억원 들여 리모델링한 극장이 날아갔다. 그 사람은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재산을 전 부인 명의로 빼돌려놔서 아무것도 받을 수 없었다."
―한국에서 영화수입을 93년 시작했다. 10여년이 지난 시점이었는데 한국 물정을 그렇게 몰랐나.
"그 극장을 소개한 사람이 영화관련 기관장이었다. 일본에서는 그런 정도의 위치라면 믿을 수 있다. 그 사람이 동향 사람이라고 소개했는데…. 건물주가 나에게 줬던 2~3년간의 극장매출 수치도 거짓말이었다. 40억원을 버렸다 생각하면 그만인데, 문제는 일본이었다. 20년간 거래에서 신용을 얻은 덕에 '한국에서 사업하는 것은 위험하다' '한국 쪽 자료를 믿기 어렵다'고 하면서도 은행이 융자를 해줬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들이 맞은 거다. 일본 쪽에서는 내가 한국에다 돈을 빼돌린 것이 아닌가 의심했고, 그러면서 추가대출이 되지 않아 돈줄이 막혔다."
―일본 쪽에서는 왜 한국에 투자하는 걸 반대한 건가.
"한국에 가서 사업하는 사람들은 다 망해서 왔으니까."
―정말 그렇게 어려운가?
"아주 젊어서 와서 한국 특성을 알고 사업을 하면 괜찮겠지. 그런데 일본에서 사업하거나 직장에 다니다가 한국에 와서 공장 짓고 사업체 차리면 거의 다 실수하고 망하더라. "
―한국이 후져서 그렇다는 얘기인가.
"정서의 벽을 넘기 어렵다. 시스템도 다르고."
―시스템이 다르다고 하는 건 예를 들면?
"여기다 돈을 주는 일은 잘된다. 돈을 받는 일이 안 된다는 거다. 한국 영화 서너 편에 투자한 적이 있다. 일본은 투자를 하면 제작위원회가 만들어져 간사회사가 정기적으로 정산한다. 그런데 한국은 제작사에 투자하고, 배급사가 정산해서 또 제작사에 나눠 주는데, 시기도 일정치 않고 '다음에 할게' 하는 식이다. 작은 회사나 예전 쇼박스, CJ 엔터테인먼트 같은 대기업도 다 그랬다."
―그러면 한국에서 다시는 사업을 하지 않을 작정인가.
"한국 아니라 미국에서도 실수할 수 있다. 그런데 내 실수의 원인은 한국에 대한 일그러진 애정 때문이었다. 한국이 아니었으면 절대 그런 식으로 계약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이 싫다기보다는 내가 너무 믿었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는 좀 더 리즈너블하게 해야겠다는 마음을 다지고 있다."
리즈너블, 합리적으로 하겠다는 뜻이다. 그가 말하는 '리즈너블'이 어쩌면 '너를 믿지 않겠어'라는 뜻으로 들렸다.
나의 국적은 자이니치?
지난 월드컵에서 북한 대표 선수로 뛴 정대세가 "나의 국적은 한국도 북한도 일본도 아닌 '자이니치(在日)'"라고 말한 이후 이 단어는 지금 일본에 사는 한국인을 부르는 상징적인 단어가 됐다. 약 60만명에 이르는 재일한국인 중에는 조총련계가 운영하는 조선학교 출신들이 상당수다. 이 학교 출신인 정대세는 "한국 걸 그룹이 좋다"고 했다. 뭔가 이 말은? 그저 젊은이의 경쾌한 말일까. 아니면 '자이니치'들에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특수정서가 있는 것일까. 또 다른 자이니치인 이봉우에게 물었다. 이봉우 역시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조선학교에서 마쳤고, 95년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50년을 일본에서 살면서 35년간 조선 국적자, 15년을 한국 국적자로 지내왔다.
―한국에서는 조선학교 출신이라면 '빨갱이?' 하는 느낌이 든다.
"아버지가 4·3사건을 피해 48년 일본으로 건너왔다. 그해 남북에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적을 선택할 순간이 되자, 상당수가 북한을 택했다. 가난한 것은 다름이 없었지만, 북한이 일본에 학교를 지어줬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면 왜 북한을 지지했겠나. 그때 한국이 잘못한 거다. 조선학교 다녀서 한국말 하면 빨갱이, 한국말을 못하면 반역자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해방 후 일본 정부는 조선학교에 다니는 학생을 일본 학교에 편입시키려 했으나 교포들이 이에 저항했다. 최근에도 일본 정부는 고교 무상교육 대상에서 조선학교를 제외하려 했다가 철회키로 결정했다. 150개가 넘던 조선학교는 학생 수가 줄며 현재 78개만 남았고, 학생 수는 약 8000명이다. 한국에서는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도쿄 한국학교를 건립한 이후 4개 학교의 재정을 지원하고 있으나, 약 2000명의 재학생 중 절반이 일시체류자 자녀다.)
―한국이 재일동포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나.
"지금도 그렇다. 아무 관심이 없지 않은가. 일본 사는 한국사람 중에는 징용으로 끌려간 사람, 생활고로 넘어간 사람 등 여러 가지다. 미국 가서 사는 사람과는 다르다. 한국 정부는 역사적 맥락을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조선학교를 통해 배우는 한국은 어떤 나라인가.
"한국이 군사독재정권에 미군이 지배하는 식민지국이라는 식으로 가르친다. 초등학교 때는 '그럴까' 하는 생각도 했다. 아버지 공장서 일하는 사람들, 아버지 고향 사람들이 다 가난했으니까. 그런데 70년대 들면서 오히려 한국에서 선물이 오더라. 한국에 대한 인상은 조금씩 변해왔다."
―일본에서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보면 한국의 다른 모습이 보이지 않았나.
"학생이 바보가 아니니까 그런 것은 당연히 안다. 교사들도 다 알고 있다. 그리고 일본에 있는 학교니까 그런 것을 말하는 것도 자유롭다."
―그러면서도 조선학교를 계속 다닌 이유는 뭔가.
"아버지가 다니길 원했으니까. 또 같은 처지, 같은 동네 사람들이 모두 그 학교에 다니니까."
―한국말도 중요하지만, 완전히 일본에 동화되어야 한다는 부모도 있지 않은가.
"100명 중 20~30명은 일반(일본) 학교로 옮기거나 귀화했다. 그들에게도 사정이 있으니까 비난하지 않는다. 지금도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 있다."
―대학도 조선학교로 간 것은 왜인가.
"고1 때 아버지 공장이 부도가 나서 돈이 없었다. 특별장학생으로 다녔다."
―한국에서는 재일동포 교육을 지원하지 않나.
"한국 정부가 지원하는 한국학교는 외교관 자녀나 주재원들이 다니는 학교지 자이니치를 위한 학교는 아니란 생각이 대부분이다. 그 학교에선 일본말을 더 많이 쓴다."
―그럼 한국 국적을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국적은 사실 별 관심사가 아니었지만, 조선국적을 갖고는 외국 다니기가 어려웠다. 유럽·남미 어디를 가도 두 달 전에 비자를 신청해야 한다. 미국에 가려면 '가서 반미활동 하지 않겠다'는 바보 같은 선언까지 해야 하니까 불편했다. 외국과 회사 일을 하는 게 힘들었다."
―국적은 어떻게 바꾸나.
"제주도 작은아버지가 호적을 떼어 보낸 것을 들고 한국 영사관에 가서 국적 신청을 했다. 2주일 후에 나왔다."
―기분은 어땠나.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 패스포트 나왔다' 정도?"
―그렇게 한국에 대한 감흥이 없다니 좀 놀랍다. '이게 아버지 나라다'라는 생각이 든 적은 있나.
"96년 제주 한림읍 선산에 부모님 묘를 만들었다. 조상과 친척들 묘비를 보니, '혹시 여기서 내 DNA가 흘러오나?' 하는 느낌이 들더라."
―정대세를 보면 북한 대표로 뛰며 한국 걸 그룹을 좋아한다더라. 자이니치들의 정서는 뭔가 싶더라.
"지난 월드컵 출전하기 일주일 전, 정대세와 식사를 했다. 정대세는 조선학교 축구부 후배다. 남북전을 해서 한국을 이기고 싶다고 했다. 우리가 이렇게 꿋꿋하게 조선 이름으로 살아왔다 하는 것을 증명하는 게 되지 않을까 하는 얘기였다. 그런 생각은 나한테도 있다. 한국이 우릴 버렸어도 우린 여기서 한국말 지키며 잘 살았다, 이런 것을 보여주고 싶은 생각이랄까. 정대세가 좀 더 민족주의자에 가깝긴 하지만."
―왜 그런 마음이 드나. 놀랍다.
"일본에서 한국 이름 쓰는 사람은 주로 조선학교 출신이니까."
―북한에는 가봤나.
"스무 살에 갔었다. 월북한 외삼촌 하나가 함경도 해산에서 살았는데, 겨울에 영하 25도더라. 그렇게 추운 곳에서 그렇게 가난하게 사는 걸 보고 놀라웠다. 어머니가 늘 돈을 보내줬는데, 중국에 가서 어머니 대신 돈을 전해준 적이 두 번 있다. 그런데 생활이 너무 어려우니까 인간적으로 통할 여지가 전혀 없더라. 나를 만나면 삼촌이 (손을 모으고) 빈다. 돈 달라, 구두 달라, 뭐 달라고 하면서 빈다. 너무 괴로웠다."
―북한에 관한 느낌은 어떤 건가.
"북한은 멀다. 가기도 어렵고, 별 인연도 없다. 그런데 학교를 지어주고, 조선말을 가르쳐주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준 나라다. 자이니치에게 북한은 멀리 있는 친척 아저씨 같은 나라, 그런데 갚아야 할 신세를 진 나라다."
―북한에서 주민들이 굶어 죽고, 3대까지 세습하는 것을 봐도 그런가. 주민을 괴롭게 만드는 나라와 말 가르쳐 준 나라는 같은 나라인가, 다른 나라인가.
"그 사실에 재일동포들은 완전히 실망하고 있다. 그런데 정치가 좋지 못하니까 그런 거지 주민은 불쌍하지 않나. 그들 체제의 문제가 있다는 것과 어떻게 통일이 돼야 하나 고민하는 건 다른 문제다."
―그러면 북한과 비즈니스는 왜 안 하나.
"한국에서도 반은 죽었는데, 북한에서 하면 완전히 죽는다."
―그러면 한국에 대한 마음은 어떤 것인가.
"큰아버지 혹은 작은아버지. 아버지하고는 옛날에 사연이 많았다고 하는데 나와는 말이 통하지 않는…. 정은 있지만 흔하게 만나긴 싫고 가끔 만나고 싶은 존재."
―한국에 대한 느낌이 개선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지금 조선학교는 학생 수가 줄어 조선학교 학비가 일반학교의 서너 배다. 한국말은 시켜야 하는데 돈 때문에 못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 정부가 직접은 아니라도, 민간 기금이라도 학생들이 한국말을 배우도록 해주면 3·4세들 생각도 많이 바뀔 것이다. 일본 사니까 일본말만 배워라? 한국 아이들이 한국말을 배울 권한은 있는 거 아닌가."
―일본에서 '자이니치'의 이미지는 어떤 건가.
"예전엔 싸움 잘하고 무서운 사람으로 통했다. 고리대금업자·파친코·야쿠자를 쉽게 떠올렸다. 이제는 기업에도 들어가고 많이 좋아졌다. 80년대부터 조금씩 달라지고, 2000년대 들어서 특히 많이 달라졌다. 한류가 형성되면서 나에게도 엽서가 많이 왔다. 센다이에서 조선학교 학생이 보냈더라. 병원 대기실에서 '김아무개'라 불리면 부끄러웠는데, 이제는 부끄럽지 않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사람을 위해 해놓은 것이 있다는 것 때문에 반가웠다."
일본 촌동네에 영화를 보여주겠다
극장도, 제작사의 경영도 내놓은 그는 이제 '영화 낭인'이 됐다. 메이저 영화사와 방송사가 장악한 일본 영화계에서 인디펜던트(독립) 영화제작자로서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했던 이봉우. 그는 어떤 돌파구를 찾고 있을까.
―시네콰논에서 물러났으니 이제 뭘 할 건가.
"10년 전쯤 이동영화관(cinemobile)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파리에서 170㎞ 떨어진 도시, 오를레앙으로 보러 갔다. 16t짜리 커다란 트레일러 안에 객석 100개와 스크린이 들어 있다. 일주일 정도 이 영화관이 머무는 동안, 마을은 온통 축제가 벌어진다. 영화 보고, 와인 마시고, 댄스하고, 노래 부르고. 이걸 어떻게 못할까 생각하다가 제작하느라 잊고 살았다. 페스타(Festa)란 이름의 회사를 차려 이 사업을 준비 중이다. 차 한 대가 1억엔 정도인데, 우선 한두 대로 내년부터 시작한다. 화장품 회사에서 자동차 외부에 광고하는 걸로 제작비 일부를 충당키로 했다. 차량을 일본에서 제작할지 유럽에서 사올지 고민 중이다."('시네 모바일'은 프랑스·영국·아일랜드·스페인 등 유럽 등지에서 운영 중이다)
―선진국에 이동영화관이 다닌다는 게 어쩐지 이상하게 느껴진다.
"한국도 그렇지만 일본에도 어디를 가나 멀티플렉스다. 지금은 없어진 학생들 단체관람도 부활시키고, 노인들만 사는 마을에도 가서 영화 축제를 해보고 싶다. 원시적인 형태로 영화를 보는 거 재미있지 않겠나."
―영화는 이제 더 안 찍나.
"당장은 아니지만 새로운 걸 해보고 싶다. 아시아에서 가장 우수한 한국과 일본의 영화 인력을 결합해 한국이나 일본에서 나온 적이 없는 영화를 할 작정이다."
―일본 정부에서는 영화 지원을 안 하나. 한국은 지금 정부의 영화계 지원이 줄어든다고 난리다.
"솔직히, 지원은 많이 필요 없다. 정부 지원이 많아지면 감독이나 프로듀서가 게을러진다. 프랑스도 그랬다. 지원을 한다면 기획, 시나리오, 감독 교류, 교육 비용으로 써야지 직접 펀드를 만들어 제작비를 대주는 것은 별로다. 일본 영화가 메이저들 틈에서 나날이 경쟁력을 잃고 있어서 그게 진짜 위기다."
―그렇지만 '굿바이' 같은 영화가 지난해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도 받지 않았나.
"그 영화와 봉준호 감독의 '마더'를 비교하면, 연기력, 연출력, 분장, 미술… 뭐가 우수한지 금방 보인다. '굿바이'가 아카데미를 수상했다 해도, 영화 힘은 다 아는 거다('마더'가 우수하다는 뜻)."
―'영화를 해서 좋았다' 하는 순간은 언제였나.
"회사가 부도나고, 8개월쯤 놀았다. 그 사이 약 250통의 편지를 받았다. 대부분은 '당신은 또 할 수 있다', '내가 당신 영화에서 얼마나 용기를 받았는지 아는가, 힘내라' 하는 내용이었다. 대개 일본인들이었다. 내가 스타도 아니고 일반기업인일 뿐인데, '아, 내가 좀 다른 일을 해왔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글쎄요', '어떨까' 같은 조심스러운 일본식 말 습관, 읊조리듯 비슷한 톤으로 말을 이어가던 그가 이 말을 할 때, 그의 목소리는 살짝 들뜨기 시작했다.
1960년 교토 출생. 일본 조선학교 교토제1초급학교, 교토 조선중고등학교 도쿄조선대학 졸업, 프랑스 제3대학(소르본누벨) 대학원 수료.
제작 영화/'달은 어디에 떠있는가'(1993년), 'KT' (2002년,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 출품), '아무도 모른다'(2004년,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 '박치기'(2005년, '키네마준보 선정 베스트10' 1위, 일본아카데미 우수상 등 수상) '훌라걸스'('키네마준보 베스트10' 1위, 일본 아카데미상 최우수작품상)
일본배급영화/'카메라광'(폴란드) '브래스드 오프'(영국), '투게더'(중국), '서편제'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오아시스' 등(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