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은 6·25전쟁 당시 순식간에 낙동강 전선까지 밀린 상황에서 북한군의 배후를 쳐 위기에서 벗어나자는 구상으로 출발했다. 처음에는 인천과 군산, 주문진 등 3곳을 대상으로 검토하다가 유엔군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의 결정으로 인천이 최종 선택됐다.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가 10여m나 돼 상륙작전에 적합지 않다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서울과 가깝고, 서울 탈환은 북한군에게 상당한 심리적 타격을 줄 수 있으며, 남한 깊숙이 들어온 북한군의 보급선을 차단하기에도 좋다는 점 등이 고려됐다.

이 계획에 따라 상륙부대로 미국 제10군단이 창설됐고, 그 아래 미 제7사단과 국군해병연대 등 총 병력 7만5000명이 편성됐다.

1950년 9월 15일 새벽 미국영국, 호주, 프랑스 등 8개국의 항공모함과 구축함, 순양함 등 261척의 함정이 인천앞바다에 집결했다. 함대는 미 해군정보장교 클라크 대위 일행이 팔미도 등대에서 밝힌 불을 안내자로 삼아 인천항에 이르렀다.

이날 새벽 5시부터 함포사격과 함께 상륙작전이 시작됐고, 6시 33분 선발대가 월미도(Green Beach)에 상륙했다. 정오쯤에는 월미도 일대에 있던 북한군을 섬멸하고 주변을 장악했다. 이어 오후 5시 32분 후발대인 미 해병 1연대가 지금의 남구 용현5동 일대 해안(Blue Beach)에, 5시 33분에는 미 제5해병연대가 동구 만석동 부근(Red Beach)에 상륙했다. 국군 해병 1연대도 오후 8시 만석동 부근에 상륙해 시가지 소탕전과 외곽 경비를 맡았다.

이날 작전에서 인천에 상륙한 유엔군은 1만3000여명이었으며, 전사 21명, 실종 1명, 부상 174명의 피해를 보았다. 인천을 교두보로 확보한 뒤 미 해병 제1사단은 16일부터 서울로 진격했다. 이어 후발 부대인 미 제7사단과 국군 제17연대가 인천에 상륙해 서울수복 전투에 가세함으로써 9월 28일 마침내 서울을 탈환했다. 이로써 인천상륙작전은 6·25전쟁의 전세를 단번에 바꿔놓은 역사적인 작전으로 기록을 남기며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