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과 인연을 맺었던 정치인이나 관료들에게 '불상사'가 잇따르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이번엔 김태호 국무총리 후보자가 박 회장과의 악연으로 낙마했다. 정치권은 언제 '박연차 괴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 답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박 전 회장이 '저승사자'가 될 정치인이 앞으로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박연차 그는 누구인가

일단, 박 전 회장은 '통'이 크다는 게 접해본 사람들의 증언이다. 지난해 '박연차 게이트' 사건을 맡았던 검찰 관계자의 말. "박 전 회장은 다른 기업인과 단위가 달라요. 정치인에게 돈 준 사실 진술하면서 5000만원은 '5000원'으로 1만 달러는 '1만원'이라고 하대…." 돈 단위에서 '만'을 떼어내는 게 입에 밸 정도로 씀씀이가 컸다는 것. 그의 집무실 금고엔 항상 현금 3억~5억원이 쌓여 있었고 승용차엔 발렌타인 30년산 등 최고급 양주가 실려 있었다.

박 전 회장이 정치인이나 고위 공무원들만 챙겼던 것도 아니다. 2000년 67억원으로 정산장학재단을 만들어 수백명의 학생에게 10억원 이상의 장학금을 줬다. 김해장학재단에도 5억원을 출연했고 동아대경남대 등에 10억원 이상의 발전기금을 냈다. 동남아 쓰나미 피해복구 지원금으로 적십자에 1억원을 기부했다. 박 전 회장이 식당 종업원에게 주는 팁도 남들의 5배가량 됐고 지인들에게 전하는 부의금 액수도 '0'이 한 개 더 붙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이 2008년 12월10일 대검찰청에서 조사를 받고 귀가하면서 승용차에 오르고 있다. 그는 이틀 뒤 구속됐다.

태광실업은 이제 막 중견기업 반열에 오른 수준이었으나 오너 박 전 회장의 씀씀이는 오래전부터 재벌 뺨치는 수준이었다는 것. 1990년 '재벌 2세와 유명 연예인의 히로뽕 성매매 사건'에도 연루된 그였다.

인연 맺었다 줄줄이 다쳐

그런 박 전 회장은 2003년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권력'까지 거머쥐었다. 특히 부산·경남 일대에선 대통령 못지않은 권세를 누렸다. 지역 기관장들이 모여 있는 회의장 문을 발로 '뻥' 차고 들어가도 누구 하나 토 달지 못했다고 한다. 권력의 단맛에 빠지면 '뵈는 게' 없을 법하지만 박 전 회장은 그렇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 측근은 물론 당시 야당 인사들을 관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미래권력' 후보들에게 보험 들자는 취지.

인연 맺을 땐 서로 좋았을지 모르나 지금은 박 전 회장과의 만남을 후회하는 인사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박미모'(박연차를 미워하는 사람들의 모임)라도 만들어야 할 판이란 얘기가 나온다.

그 대표적 인사들이 작년 6월 '박연차 게이트'로 재판에 넘겨진 20명이다. 당시 노무현 정권 진영은 초토화됐다. 김원기 전 국회의장,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 이광재·서갑원·최철국 의원, 장인태 전 행자부 장관, 김태웅 전 김해시장, 이정욱 전 한국해양수산개발원장 등이 박 전 회장에게서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받은 혐의로 기소됐다.

한나라당에선 박관용 전 국회의장, 박진·김정권 의원, 추부길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 송은복 전 김해시장 등이 기소됐다.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인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은 태광실업 세무조사 무마로비와 조세포탈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정치권뿐 아니라 이택순 전 경찰청장과 김종로 검사가 기소됐고, 민유태 전 전주지검장, 박성철 전 부산고법 부장판사는 불명예 퇴진했으며 이종찬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구설에 올랐다. 박진·김정권 의원과 이상철 전 서울시 정무부시장이 최근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이미 입은 엄청난 상처를 보상받을 길은 없다.

뇌관은 여전히 살아있다

김태호 후보자는 박연차 게이트 당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이번 인사청문회에서 박 전 회장을 알게 된 과정에 대해 거짓말을 하면서 결국 좌초했다. 수사는 피했지만 여론 심판을 이겨내지 못한 것. 이제 '큰 뜻'을 품은 정치인이라면 불법 자금을 받았는지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박 전 회장과 어떻게 알게 지냈느냐를 해명하는 것도 새로운 과제가 됐다.

박 전 회장은 노무현 정권 5년간 수많은 여야 정치인과 교분을 맺었다. 특히 야당 대권 후보로 분류되는 지방자치단체장 중 일부가 향후 정치 행보에서 박 전 회장과의 '인연'을 숙제로 남겨두고 있다는 분석이 많다.

이광재 강원도지사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이 지사는 박 전 회장에게서 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고 조만간 대법원 판결이 나온다. 원심(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이 그대로 유지될 경우 도지사직을 박탈당하고 피선거권까지 잃게 된다.

안희정 충남도지사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안 지사는 박 전 회장에게서 상품권 5000만원어치를 받은 혐의로 작년에 검찰 조사까지 받았으나 기소되진 않았다. 박 전 회장이 혹 '이상한 얘기'라도 하면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는 상황이다. 경남에 연고를 둔 김두관 경남지사 역시 박 전 회장과 모르는 사이가 아니다.

현 정권 인사들 중에서도 박 전 회장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박 전 회장이 지난 대선에서 한나라당을 도왔다는 얘기가 끊이지 않고 있고, 2008년과 2009년 세무 조사와 검찰 수사를 막기 위해 실세들에게 접근했다는 소문도 돌고 있다. 이래서 한국 정치권에서 '박연차 뇌관'이 완전히 제거되려면 최소 10년은 지나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