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국내에 무에타이 광풍(狂風)이 불었다. 그해 개봉한 태국 영화 '옹박'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확히 말하면 '옹박'에 나온 액션은 무에타이가 아니다. 그 시조(始祖)인 '무에보란'이라는 무술이다.

무에타이의 원조 무에보란이 시작된 것은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완전한 실전(實戰) 무술인 무에보란을 링에서 경기하기 알맞게 관절기와 공중 동작을 줄이고 덜 위험하게 변형시킨 게 바로 무에타이다.

파이터가 된 비행 청소년

충북 청주에서 무에타이 도장을 운영하는 김정섭(32) 관장은 한국 무에타이 세 체급을 석권했다. 페더급, 라이트급, 주니어웰터급이다. 그는 선수 출신으론 한국에서 처음으로 무에보란까지 익혔다.

몸을 날려 공격을 퍼붓는 김정섭 관장의 모습은‘옹박’의 주연 토니 자 못지않게 강렬했다. 김 관장은“완벽한 전쟁무술인 무에보란을 익히니 1대3, 1대4 싸움도 두렵지 않다”고 했다.

김 관장은 증평중 1학년 때 '우슈'를 배웠고 청주기계공고 1학년 때부턴 이소룡의 절권도를 배웠다. 하지만 길거리 싸움으로 자신이 진짜 얼마나 센지 알아볼 수 없었다. 자칫 소년원 신세를 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 1때 복싱을 시작했다. "제대로 싸우려면 링으로 올라가는 수밖에 없잖아요." 잠시 방황하기도 했다. 고교 시절 아마복서로서의 성적이 4전 2승2패에 그치자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행패를 부린 것이다.

재미 삼아 날린 주먹에 친구가 거품 물고 쓰러지도록 한 적도 있었다. 그는 "어느 순간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비행(非行)'이 싫어지더라"며 "고교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운동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복싱에 환멸을 느껴 전신(全身) 무술 무에타이에 입문했다. 2001년이다. 그리고 이듬해 겨울 한국 무에타이 라이트급 챔피언이 됐다. 그 뒤엔 절권도와 무에타이로 중무장해 2003년 복싱 신인왕전 정상에 오르기도 했다.

태국 중학생에 깨졌던 '까치독사'

김 관장이 처음 태국을 찾은 건 2001년이었다. 무에타이 종주국의 실력을 보고 싶어서였다. 첫 스파링에서 김 관장은 깜짝 놀랐다. 현지 관장이 붙여준 스파링 상대가 중학생쯤 보이는 '꼬마'였던 것이다.

그는 자존심이 상했다고 한다. "한국에선 그래도 좀 하는데, 상대가 어린 선수라니… 어이가 없죠." 그런데 막상 붙어보니 결과는 정반대였다. 빠르게 들어오는 꼬마의 연타(連打)를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힘은 제가 셌지요. 그런데 어려서부터 무에타이를 익히면서 공수의 흐름과 타이밍을 아는 상대한테는 안 되겠더군요." 김 관장은 이후 더 높은 경지를 향해 나아갔다. 매일 아침 6시부터 하루 6~7시간 훈련했다.

매년 2~3차례씩 태국을 오갔다. 결국 그는 전라도 사투리로 살무사인 '까치독사'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50전41승9패 25KO라는 놀라운 전적을 거뒀다. 한국 무에타이 세 체급의 챔피언 벨트가 그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런 김 관장이 2007년 5월 홀연히 은퇴했다. "진짜 싸울 만큼 싸우고 이길 만큼 이겼다는 생각이 드니깐 이제야말로 무도인이 되고 싶더라고요." 그게 무도인이 갈 길인지 모른다.

무에보란은 전쟁 무술이다

김 관장은 2007년 방콕으로 가 옹박의 주인공 토니 자(34)가 무에보란을 배웠던 그 도장에 들어갔다. 김 관장은 "처음 무에보란 시범을 보고 '내가 알던 무에타이 기술이 무에보란의 작은 일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은퇴하고 청주에 차린 도장 때문에 방콕에 머물 수 있는 기간은 두 달이었다. 그는 낮엔 동작을 익히고 밤엔 노트에 적은 낯선 무에보란 용어들을 외워가며 무에보란에 빠져들었다.

김 관장은 이후 한국에 돌아와 70여명의 학생을 가르치면서 혼자 무에보란을 익혔다. 그리고 매년 두 번 방콕으로 갔다. 무에타이와 전통 무술 무에보란을 더해 자신의 실력을 더 높은 곳으로 끌고 가려는 수련이었다.

그 결과 김 관장은 올 3월 무에보란 세계대회 2위에 올랐다. "무에보란은 전쟁 무술이에요. 순간적인 파괴력과 스피드는 무에타이가 따를 수 없죠. 선수 시절엔 1대3, 1대4로 싸울 때 어떻게 할지 몰랐는데, 무에보란을 수련하니 실전 감각이 예민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잘나갔을 시절 이종격투기 K-1의 영입 제안도 받았던 그에게 '표도르를 이길 수 있느냐'고 물었다. "체격이나 파워로 보면 링에선 절대 안 되죠. 길거리 싸움에선 어떻게 될지 몰라요. 반대로 저도 넋 놓고 있다가 누구한테 길거리에서 한 대 맞고 뻗을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