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서울의 상징'으로 선정된 해치가 시민들에게 부지런히 얼굴을 알리고 있다. 해치는 서울시청 각종 서식류와 결재판, 공무원 배지에 등장한다. 서울시내 투어버스나 택시, 공사장 가림막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동그란 얼굴에 후덕하게 큰 코, 편안한 미소를 가진 해치는 캐릭터와 애니메이션 등으로 만들어졌고, 광화문광장 '해치마당'에서는 조각상과 캐릭터 상품도 볼 수 있다.

어디나 흔한 해치지만 그 역사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조선 수도 한양의 역사를 생생히 지켜보며 묵묵히 민족의 애환을 함께 했던 해치. 서울 건축물과 유물에 남아있는 다양한 모습의 해치에는 민족의 역사가 담겨 있다.

◆법과 정의의 상징, 화마를 막아주는 신수(神獸)

해치는 '법과 정의'를 지키는 상상의 동물로 전해진다. 눈을 부릅뜨고 머리 한가운데에는 뿔, 몸에는 방울과 날개가 달린 해치는 고려 공민왕 때 중국에서 전해내려와 조선 말까지 법의 상징으로 사용됐다. 송시열의 후손 송근수가 지은 '송자대전수차(宋子大全隨箚)'에는 "해치는 동북쪽 황야에 사는 동물로 성품이 충직해 다투는 사람들을 보면 그중 나쁜 사람을 뿔로 들이받는다"고 적혀 있다. 또 조선시대 관리들을 감찰했던 사헌부 관리들은 해치관(冠)을 썼으며, 궁궐을 드나드는 관리들은 해치상(像) 꼬리 부분에 손을 얹는 관습을 통해 청렴함을 되새겼다고 한다.

지난 15일 복원 공사를 마치고 모습을 드러낸 서울 광화문과 그 앞에 서 있는 해치상.

해치는 왕권을 '수호(守護)'하는 의미도 가졌다. 조선 태조 3년(1394년)에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면서 궁궐 주변에 해치상이 세워지기 시작하는데, 물을 좋아하는 해치가 화마(火魔)를 막아준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중 광화문 해치는 불기운이 강한 관악산을 마주 보는 경복궁을 화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근대미술 대가 이세욱 장인이 1865년 제작했다. 하지만 1923년 10월 일본인들이 조선총독부 청사 서쪽 담장 밑으로 옮기고, 6·25전쟁 이후인 1968년 광화문을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하면서 다시 광화문 앞에 놓였지만 원래 위치보다 13m뒤쪽으로 밀려났다.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앞다리 한쪽이 부러지는 등 수모를 당했던 광화문 해치 조각상은 지난 15일 다시 얼굴을 드러냈다.

광화문뿐 아니라 조선 초기 왕권의 존엄을 상징하기 위해 궁궐 주요 부분에 화강암으로 된 해치상을 세웠다. 경복궁에는 근정전·경희루·흥례문·자경전 등에 총 49점의 해치상이 있다. 보통 해치는 암수 구분이 없는 동물로 알려졌지만, 경복궁 근정전 앞에는 엄마·아빠·아기 해치가 각기 다른 곳을 바라보며 한 곳에 붙어 있는 '가족 해치상'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 밖에도 창덕궁 금천교 등에 쭈그려 앉거나 정자세를 하는 해치 조각이 총 9점에 이르고, 창경궁(8점) 경희궁(24점), 덕수궁(12점), 원구단(30점) 등 조선시대 건축물 곳곳에서 해치 조각상을 찾을 수 있다.

◆조선 후기 때 민간에 보급, 현대 건축물에도 많아

해치는 조선후기 들어 왕과 귀족뿐 아니라 일반 백성에게도 많이 보급됐다. 악귀를 쫓는 벽사와 복을 비는 길상의 상징으로 사용됐는데, 특히 서민들은 불을 다루는 부엌 등에 안전을 상징하는 의미로 해치 무늬가 그려진 그림이나 소품들을 걸어뒀다. 또 비싼 조각상을 만드는 대신 값싼 종이에 해치 문양을 그려 부적처럼 지니고 다녔다. 강원 영월 조선민화박물관에는 해치 부적을 찍어내는 판화도 있다. 종로구 가회동 가회민화박물관에서는 한지에 그려진 해치 민화를 볼 수 있고, 국립고궁박물관에는 해치 쇠뿔 장식함·금장식 주머니, 서울역사박물관에는 해치 받침 촛대, 청화백자 해치 연적 등을 찾아볼 수 있다.

현대에 만들어진 해치상들도 있는데 각각 의미가 다 다르다. 청와대 영빈관 앞에는 광화문 해치상과 똑같이 생긴 해치상이 있고 국회의사당에도 국민을 위한 정의로운 입법활동 염원을 담아 2점이, 대검찰청에도 1999년 5월 1일 '법의 날'을 맞아 청사 옆에 청동해치상 1점이 설치됐다. 서울대 법대 앞에 있는 '정의의 종'에는 해치가 부조로 새겨져 있고, 서울시청 제1별관 정문에도 2009년 '정의와 청렴'의 상징으로 해치상 2점이 놓였다. 종로구 내자동 서울경찰청사 옆에도 해치상 2점이 있다.

서울 수호의 상징으로 만들어진 해치도 있다. 천호대로와 하남시 경계, 송파대로와 성남시 경계, 개화로와 김포시 경계 등 10개 지역에 총 19점이 서 있다. 국토수호 상징으로 국방부 청사 앞에도 2점이 있으며, 불을 막고 안전을 지키는 의미에서 중구 예장동 소방재난본부에도 2점이 있다. 조선 후기 때 일반 백성들이 해치 부적을 만들고 민화를 그렸던 것처럼, 일반 시민들이 최근에 설치한 해치상들도 곳곳에서 있다. 종로구 내수동 경희궁의 아침 4단지, 중구 정동길 두비빌딩, 명동 밀리오레빌딩, 강남구 테헤란로 한중앙빌딩, 도봉구 쌍문동 도봉로변 건물, 성북구 정릉3동 정원길 다리, 고려대학교 박물관 등에도 화재를 막고 입주자·방문자의 행운을 바라는 뜻에서 해치상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