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리 사연 있는 사람투성일까. 귀화한 중국 소프트볼 대표, 한국과학기술원 박사, 전직 카레이서, 재일교포 대학생…. 체육교사나 국제야구연맹 위원 정도의 경력은 내세울 정도도 못 된다. 한국 여자 야구 대표팀 얘기다.

대표팀엔 19명이 있다. 42세의 전직 야구 심판부터 19세의 대학 1년생까지 개인 내역을 읊으면 소설 한 편 분량쯤은 훌쩍 넘어갈 태세다. 이들이 요즘 삼복더위 속에서 흘리는 비지땀이 장충동 리틀야구장을 흠뻑 적시고 있다. 12일부터 베네수엘라에서 벌어지는 2010 세계여자야구월드컵대회에 대비해 맹훈련 중이다. 8일 구리 LG구장에서 벌어진 노노(老老)야구단과의 연습경기에선 9대8로 이겼다. 노노야구단은 60세 이상들만 모인 사회인 야구팀이다.

삼복 더위도 여자 야구 대표 선수들의 야구 열정을 막지는 못했다. 총 19명 중 17명이 미혼인 이들은“야구가 좋아 남자 사귈 틈이 없다”고 웃었다.

"무섭지만 그래도 재밌는 야구"

한국과학기술원 항공우주공학과 박사 과정에 다니는 투수 명현삼(32)씨는 6일 부리나케 짐을 싸들고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지도교수의 허락을 받아 3주간의 특별휴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처음 국제대회에 나가는데 가슴이 막 떨리네요." 야구를 시작한 지 3년째라는 그는 "우주공학보다 야구가 더 재미있다"고 했다. "어렸을 때부터 프로야구 팬이었는데 직접 해보니 배울 것도 많고 성취감도 생겨요."

대표팀의 4번 타자 왕종연(28)씨는 중국 소프트볼 국가대표 출신이다. 랴오닝성 다롄 출신인 그는 2002년 중국 여성해방군 소속으로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 국내 프로야구의 재미에 쏙 빠져 버렸다. 2003년 호서대에 소프트볼 장학생으로 입학한 뒤 2008년엔 한국 국적을 취득해 그해 일본에서 벌어진 월드컵에 출전했다.

왕씨와 함께 국내 유일의 여자 야구 실업팀 CMS에 소속된 김주현(40)씨는 전직 카레이서다. "91년부터 10년간 카레이서를 하면서 조금 유명했죠. 지금은 야구에 모든 걸 바치고 있습니다." 소속팀에선 감독 겸 선수인 김씨는 "여자 야구는 아직 걸음마 단계라 조금만 투자하면 한국도 정상권으로 올라설 수 있다"고 했다.

"우리도 태극전사 아닙니까"

훈련은 남자들만큼 강도가 높았다. 98년 방콕아시안게임 대표팀 감독이었던 주성노씨가 이번엔 여자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주 감독은 투수 조련을 맡고 최주억·최정우 두 코치가 타격과 수비훈련을 담당한다.

LG 트윈스 코치를 지낸 최정우 코치는 리틀야구장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큰소리로 "공을 무서워하면 안 돼!"를 외쳤다. 최 코치는 "가끔 공을 잡다가 얼굴을 다치는 경우도 있지만 열정 하나만은 프로야구 선수보다 낫다"며 "이들의 넘치는 의욕에 우리도 힘든 줄 모른다"고 했다.

서울대 출신의 컴퓨터 프로그래머 최수정(35)씨는 지난해 국제야구연맹(IBAF) 여자야구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된 국제적인 인물. 외야수인 그녀는 "수비는 좀 약한 편이지만 타격만큼은 자신 있다"고 웃었다.

여고 체육교사인 서혜진(37)씨는 "매일 밤 10시가 넘어 훈련이 끝나면 샤워도 못하고 집에 가지만 야구가 재미있어 피곤하지 않다"고 했다. 학창 시절 소프트볼을 했던 최씨는 연습 중 담장을 연거푸 넘기는 장타력을 과시했다.

42세로 대표팀 선수 중 최고령인 전문숙씨는 2년 전 월드컵엔 심판으로 참가했다. 현재 체육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그녀는 타격훈련 중 타이밍이 맞지 않는다며 최주억 코치에게 거푸 배팅 볼을 던져 달라고 주문했다.

"아직 실력은 형편없죠. 여자가 무슨 야구를 하느냐며 비웃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선수들입니다." 전씨는 "얼마 전 여자 축구에 관심이 몰리는 게 너무 부러웠다"며 "태극마크가 부끄럽지 않게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