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둘러싸고 일본러시아 등 열강들의 각축이 본격화되던 1900년대 초반, 고종의 주된 외교정책은 중립화였다. 고종은 1900년 중국의 의화단사건으로 열강의 한국 출병 가능성이 고조되자 중립화 외교를 추진했다. 그해 주일공사로 임명한 조병식에게 내린 가장 중요한 임무는 일본 정부와 주일 외교사절들에게 한국 중립화에 관한 국제협정을 제의하라는 것이었지만, 일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조선은 1903년 고영희 주일공사를 통해 고무라 외무대신과 다시 중립 보장을 교섭했다. 고무라는 중립국이 되려면 이를 보존할 실력이 있어야 하므로 국력 증진을 위해 재정 쇄신과 병제 개혁을 실시하라고 '훈수'했다.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이 점차 현실화되자 고종은 중립을 본격적으로 모색했다. 고종은 1904년 1월 21일 전시(戰時)국외중립을 선언했다.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덴마크와 중국이 조선의 중립선언을 승인했다. 그즈음 군부대신이 된 고종 측근 이용익은 2월 6일 런던 데일리 메일 특파원 매킨지와 가진 대담에서 "한국은 안전하다. 한국의 독립은 미국과 유럽에 의해 보장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매킨지는 "자신의 힘으로 뒷받침하지 못하는 조약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가. 개혁을 하든가, 멸망하든가, 길은 하나밖에 없다"라며 이용익의 안이한 국제정세 이해를 몰아붙였다. 그러나 이용익은 "우리는 중립 성명을 발표했고, 중립을 존중하도록 다른 나라에 요청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고종의 중립 선언은 일본이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 발발과 함께 2개 대대를 서울로 진입시키면서 물거품이 됐다. 그달 23일 체결한 '한일의정서' 1조는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을 확실히 믿고 시정개선에 관한 충고를 받아들인다'고 규정했다. 일본의 '보호'와 '지도'를 명시한 한일의정서는 을사늑약(1905년)과 강제병합(1910년)의 예고편이었다. 한철호 동국대 교수는 "조선의 중립 선언을 승인했던 열강들은 일본이 군대를 보내 이를 무력화시키는 것을 보고, 곧 일본 편을 들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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