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짧게 잘라 드려요?"
결정의 순간이었다. 미용사는 이른바 '스포츠머리'로 해달라는 기자의 주문을 재차 확인했다. '그냥 하지 말까'란 생각도 잠시, 용기 있는 목소리로 "네"라고 했다. 머리를 자르지 않으면 '호랑이굴'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요즘 SBS 창사 20주년 월화극 '자이언트'의 상승세가 매섭다. 지난 5월10일 첫 방송 된 '자이언트'는 전국 시청률 11.8%(이하 AGB닐슨미디어리서치)로 시작, 지난 27일엔 자체 최고 시청률인 19.1%를 기록했다. 남아공월드컵 중계방송으로 결방 하는 '불이익'도 있었지만, '자이언트'는 파죽지세를 이어가며 한때 30% 고지를 눈앞에 뒀던 경쟁작 '동이'(MBC)를 25%대로 끌어내리며 '추월'을 넘보기 시작했다.
'자이언트'는 최근 방송에서 주인공 이강모(이범수)가 삼청교육대에 입소해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기자는 '자이언트'의 인기 비결을 알아보기 위해 삼청교육대에서 근로봉사대로 옮긴 이강모 일행을 만나러 지난 30일, '어색해진 짧은 머리'로 강원도 고성을 찾았다. 그곳에서 근로봉사대의 일원이 돼 촬영(3일 방송)에 합류했다.
▶30년 전 모습 그대로 재연, 탄성이 절로
오전 11시 강원도 속초고등학교 앞. 삼청교육대에서 근로봉사대로 끌려가는 이강모 일행과 그가 죽은 줄 알고 오열하는 황정연(박진희)과 그녀의 아버지 황태섭(이덕화)이 있었다. 이날 속초고 정문 앞은 위병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고, 정문엔 '철통보완 전투태세 완비 제44사단'이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누가 봐도 완벽한 삼청교육대 정문의 모습이었다.
정문 앞에는 옛 군복을 입은 보조 출연자 50여 명이 실제 육군 트럭과 구형 지프를 타고 있었고, 군복 뒤엔 '삼청'이란 글자가 있었다. '자이언트' 의상팀장에 따르면 '삼청'이란 글자가 새겨진 군복은 드라마 '모래시계'(SBSㆍ1995) 때 사용된 것이다.
제작진의 안내에 따라 총 120벌의 군복 중 가장 큰 치수를 지급받아 서둘러 입었다. 하지만 맞는 모자가 없었다. 모자를 쓰지 않으면 체험을 할 수 없었다. 이때 의상팀장이 치수를 늘리기 위해 모자 뒤를 살짝 칼로 찢는 '특별조치'로 간신히 체험을 이어갈 수 있었다.
군복을 입고 메이크업을 받았다. 극 중 삼청교육대에서 근로봉사대로 끌려간 수련생 역이었기에 최대한 지저분하고, 얼굴 곳곳에 상처가 있어야 했다. 메이크업 후 거울을 봤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삼청교육대에서 몇 년간 혹사당한 듯한 모습의 한 사내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자이언트'가 시대극인 만큼 제작진은 사실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다. 군복은 밤색과 흰색 파우더를 발라 진흙탕을 수없이 기어 다닌 듯한 효과를 줬고, 촬영 전엔 추가로 흙을 뿌려 미세한 부분까지 챙겼다.
모든 준비가 완료된 후 주위를 살폈다. 사실적인 분장과 웅장한 현장 세트에 마치 1980년 격동의 현장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특히 그 시대 가장 암울한 곳으로 악명이 높았던 삼청교육대였기에 입이 마르고, 긴장감에 몸이 경직됐다.
▶"NG! 321번, 그렇게 움직이면 어떡해요."
오후 3시, 속초고에서 40분 떨어진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에 있는 부대 옆 1차선 도로 위에서 후속 촬영이 진행됐다. 이강모와 그의 친구 박소태(이문식)가 근로봉사대로 옮겨진 후 군사도로 건설현장에 투입, 사단장의 시찰을 받는 장면이었다. 이날 촬영엔 13년 만에 드라마에 복귀한 탤런트 송경철이 '건설의 달인' 남영출 역을 맡아 함께 했다. 남영출은 건설 자재를 훔쳐 근로봉사대에 왔고, 이후 이강모의 건설회사 창립을 돕는다.
사단장이 타고 올 지프 행렬이 준비되고 있는 사이, 사단장을 맞을 도열 준비도 함께 진행됐다. 이범수 이문식 송경철 등 배우들과 50여 명의 보조 출연자들이 두 줄로 서서 서로 마주 본 후 예행연습을 했다. 기자는 이범수 송경철 옆에 섰고, 조연출의 지시를 들었다.
시간이 흘러 감독의 '액션!' 사인이 울려 퍼졌다. 100m 떨어진 곳에서 사단장을 태운 차들이 요란한 소리를 냈고, 교관들은 '전체 차렷!'을 외쳤다. 사단장의 도착과 함께 수련생들은 "멸공!"이란 구호와 함께 거수경례로 차량을 맞았다. 사단장은 매끄럽게 깔린 도로를 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고, 교관은 기쁜 표정으로 "지금부터 목욕탕으로 직행한다. 그다음엔 오늘 하루 회식이다. 다들 실컷 마시고 놀도록!"이라고 말했다. 수련생들은 그 말을 듣자마자 모자를 공중 위에 던지곤 환호하며 서로 부둥켜안고 기뻐했다.
길지 않은 신이었지만 기자는 2번의 NG를 냈다. 동선이 헷갈려 실수했다. 그때 연출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321번! 그렇게 움직이면 어떡해요." 촬영장에선 군복 왼쪽 가슴에 부착된 수련생 번호로 불렸다. 기자는 미안한 마음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낮 신이었기 때문에 모든 촬영을 해가 떠 있을 때 끝내야 했고, 한 사람의 실수로 30도가 넘는 무더위 속에서 100여 명이 땀을 더 흘려야 했다. 또, 처음 보는 보조 출연자들과 생사를 같이했던 동지의 느낌을 최대한 살려 얼싸안고 좋아해야 했지만 생각보다 '친한 척' 하는 게 쉽지 않았다. 이때 이범수와 송경철이 기자를 위로했고, 촬영은 무사히 마무리될 수 있었다.
이날 촬영 동안 배우들과 보조 출연자들은 자신이 카메라에 잡히지 않을 때에도 열연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 특히 극에서 멍한 표정을 지어야 했던 이문식은 쉬는 시간에도 넋이 나간 표정을 유지하며 감정 몰입에 힘썼고, 이범수는 베테랑답게 표정 연기 하나에도 무게감이 느껴졌다.
제작진의 프로정신과 촬영 후 웃음이 넘치는 촬영장도 '자이언트'의 상승 요인으로 손꼽을 수 있었다. '자이언트' 속에 진짜 '자이언트'들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