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청원군의 초정노인병원에는 48년의 나이 차가 나는 '단짝'이 있다. 27살 간병보조인 윤지연씨와 75세 치매노인 허장섭(가명)씨. 뇌졸중·중풍·치매 등으로 10년째 입원 중인 허씨는 한때 간호사·간병인 등에게 '얼음 대왕'으로 유명했다. 웃는 일도 없고 가끔 화를 참지 못해 주위에 주먹을 날리기도 한다.

그러나 8년 전 지연씨가 이 병원에 온 후 허씨는 딴 사람이 됐다. "할아버지, 밥 먹자" "할아버지, 물리치료 갈 시간이야" 친손녀처럼 다가오는 지연씨 덕에 허씨는 웃음도 되찾았다. 요즘은 서로를 '애인'이라고 부른다.

이 병원에서 지연씨의 '애인'은 허씨만이 아니다. 지연씨가 담당하는 40여명의 노인환자들을 지연씨는 모두 '애인'이라고 부른다. '엄마' '아저씨'라 부르는 요양보호사들에게도 지연씨는 인기가 높아 '초정의 딸'로 통한다.

지연씨는 지능이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인 지적장애 2급의 중증 장애인이다. 하지만 오히려 하루 종일 치매 노인을 돌보는 데 있어 장점이 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눈높이'를 맞추기가 더 쉽다는 뜻이다.

노인 환자를 모시고 병원 뒤뜰로 나온 지연씨가 햇살을 즐기면서, 함께 책을 보며 얘 기하고 있다. 지적장애인이지만 지연씨는 병원에서 치매 노인들과 가장 눈높이를 잘 맞추는 간병 보조인이다.

지난달 24일 점심시간, 5층 중앙에 차려진 식탁에 치매 노인 7명이 모여 앉았다. 요양보호사들을 도와 각 병실로 식판을 나르던 지연씨는 갑자기 505호실로 뛰어갔다. 이 병실 환자 신모씨가 "지연이가 밥을 먹여달라"고 찾았기 때문이다.

지연씨는 "맛있어? 다 안 먹으면 내가 먹을 거야"라고 수다를 떨며 수발을 들었다. 신씨는 지연씨가 반찬을 올려 떠주는 죽 한 그릇을 10분도 안 돼 깨끗하게 비워냈다. 곁에서 지켜보던 요양보호사 이남규(56)씨는 "친손녀처럼 살갑게 대하는 지연이가 이곳의 인기로만 따지면 '이효리'보다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연씨가 이곳에서 일한 지 8년째. 이제 업무능력도 베테랑급이다. 5층에만 5년 넘게 근무하면서 이곳 환자 40명의 이름과 특징을 줄줄 외운다. 요양보호사들이 지연씨에게 물어볼 정도다. 매일 오전 외부 용역업체에 맡긴 세탁물이 도착하면 이를 층별로 분리해 올려 보내고, 약국에서 배달 오는 약바구니를 옮기는 것도 지연씨 몫이다. 지난해 10월에는 노인요양보호사 자격증도 땄다.

청주농업고 특수학급에 다니던 지연씨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고3 졸업 무렵이었다. 장애인을 고용하고 싶다는 초정노인병원의 요청에 따라 장애인고용촉진공단 충북지사에서 지연씨를 비롯한 10명을 선발해 교육에 들어갔다. 2002년 2월부터 3개월간 휠체어 작동법, 식사·거동 수발, 어르신 대하는 법 등을 배운 뒤 간병보조 역할로 투입됐다.

김미연 수간호사는 "지연씨는 여러 일을 동시에 하거나 수리(數理) 능력 등에서는 비장애인보다 떨어질지 모르지만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간병 보조 업무는 무리 없이 잘 해내고 있다"고 말했다. 감정조절이 서툴러 어린아이처럼 잘 토라지기도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솔직하고, 밝고, 따뜻한 성격으로 나타나 치매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는 강점이 되기도 한다.

지연씨의 월급은 100만~120만원. 4대 보험도 적용되는 정규직 일자리다. 여느 20대처럼 주말이면 친구와 함께 시내에 나가 영화도 보고, 햄버거도 사 먹는다. "꿈이 뭐냐"고 묻자 지연씨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며 잠시 생각했다. "요리나 제빵도 배우고 싶고, 고등학교 때 원예과에서 공부했던 원예 자격증도 따고 싶고…. 간병·간호도 더 배우고 싶고요."

점심식사를 마치고 지연씨는 치매 환자 이영순(가명·95)씨를 휠체어에 태워 뒤뜰로 산책을 나갔다. "할머니, 내가 누구?" "너 때문에 우리가 산다." 엉뚱한 답이 돌아왔다. 다시 지연씨가 말을 걸었다. "애인! 날씨 좋다. 그지?" 이씨는 답했다. "응. 사랑해 애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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