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림

난 밤마다 강 건너 신의주의 불빛을 안고 잠든다. 꿈속에서라도 엄마를 만나기를 소원하면서….

나는 경의선 종착지인 신의주가 건너다보이는 압록강가 단둥의 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6살 어린 아이로 돌아가 엄마를 그린다. 납북된 지 반 세기 하고도 강산이 변하는 세월이 더 흘렀건만 소식을 모르는 나의 엄마 어인애(魚仁愛).

그 긴 세월 동안 바람결에라도 무슨 소식을 들을 수 있었을 법하건만 생사조차 모르고 있으니 불효(不孝)만 켜켜이 쌓여간다. 엄마는 서울대 의대 간호학과 교수로 계셨다.

난 아직도 ‘어머니’란 말이 서투르다. 60대 중반의 나이에도 ‘엄마’가 더 익숙하다. 채 6살이 되기 전에 엄마와 생이별을 한 터라 ‘어머니’란 호칭을 미처 써보지 못한 탓이리라. 나에게 남겨진 엄마는 60년 전 서른세 살의 모습이다. 나 역시 엄마에게 여섯 살배기 어린아이로 남아 있을 것이다. 엄마는 나에게 독수리처럼 창공을 향해 높이 날아오르라고 ‘수리’라고 불렀고 그 이름은 지금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내 아들의 이름이 되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우리 모자(母子)의 이별은 1950년 6월 25일 기습남침한 북한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면서 비롯됐다. 인민군은 서울대병원을 접수하고 곧바로 의료진과 대학관계자들을 통제하고 감시했다. 서울대병원은 남산에 있던 중앙방송국과 함께 그들의 우선 점령 목표였다고 한다. 부상병 치료를 위해, 그리고 선무공작을 위해 꼭 필요한 대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엄마와 단둘이 서울대 의대 구내 관사에 살고 있었다. 부모님은 일본 유학길에 정치학도와 의학도로 만나 해방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버지와는 한동안 떨어져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인민군이 쳐들어온 6월 그 당시 나는 엄마와 잠시 떨어져 있었다. 서울에서 춘천으로 가는 기찻길목의 작은 역(驛) 강촌에 있는 외갓집에 내려가 있었다. 평소 엄마와 나는 한 달에 한두 번은 꼭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계신 강촌에 다녀오곤 했다. 그해 5월 나들이 때는 나를 남겨두고 엄마만 서울로 올라갔다. 6월 말이 외할머니 생신이라 그때 와서 데려가기로 한 것이다.

그것이 엄마를 본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석 달 만에 서울이 수복되자 패퇴하는 북한군은 서울에 남아 있던 교수, 문인, 정치인들을 끌고 가면서 엄마도 끌고 갔던 것이다.

울 안팎으론 앵두와 살구나무가, 앞 밭엔 상큼한 맛의 홍옥(紅玉)이 열리는 과수원이 딸렸던 외갓집에서 나는 하염없이 엄마를 기다렸다. 외할머니는 “새콤달콤한 앵두가 붉게 익으면 엄마가 올 꺼”라고 했지만 엄마는 당신의 엄마에게 생신 선물을 사 들고 오겠다던 약속도, 또 나를 데리러 오겠다던 약속도 모두 지키지 못했다. 따발총을 거꾸로 멘 인민군들이 들이닥쳐 집을 뒤지고, 해가 바뀐 겨울에 이상한 말씨를 쓰는 군인들(중공군)이 마을에 밀려들어 올 때도 나는 외갓집에서 할머니 치맛자락을 쥐고 맴돌았다. 할머니는 그런 나를 치마폭에 숨겨 감싸곤 했다.

외할머니는 전쟁의 충격과 후유증이 너무 커 내가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돌아가셨고, 외할아버지도 나에게 들려줄 엄마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그대로 가슴에 묻은 채 떠나셨다. 그러니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어찌 한시라도 떨칠 수 있었겠는가.

대학을 졸업해 직장을 잡은 뒤에도 월남해 서울에 살고 있는 엄마의 원산(元山) 루씨(樓氏)여고 동기생들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어쩌다 너 혼자 남았느냐”며 그들은 엄마의 아련한 추억을 들려주면서 금강산 수학여행 때 해금강·총석정에서 찍은 사진 두 장을 내게 주셨다. 긴 생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긴 엄마의 화사한 미소가 그 안에 들어 있었다.

늦깎이로 결혼할 때도 그랬지만, 연년생 남매를 낳아 기르면서도 엄마 생각은 더욱 간절했다. 엄마 소식을 알기 위해 북한을 자주 드나들던 미국 교포 지인(知人)에게, 방북하는 몇몇 종교계 인사에게 청을 넣기도 했다. 1985년 남북적십자회담을 위해 분단 뒤 처음 서울에 온 북한적십자대표단에 생사 여부를 알려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중국에 와서도 엄마를 찾을 수 있을지 이런저런 노력을 계속했다. 하지만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을 찾는 것이었을까. 무소식의 끝은 무소식일 뿐 희소식이 되어 돌아오지 않았다.

이국 땅에서 맞은 2006년 6월 25일은 60년 전의 그날처럼 일요일과 겹친 날이었다. 나는 압록강 가에 오래도록 서서 하염없이 강 너머를 바라보았다. “인륜(人倫)을 갈라놓고 있는 그 실체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1917년생이니 엄마는 올해 아흔셋이다. 그동안 “살아 계셨으면…”하는 바람으로 지내왔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피붙이’를 남겨두고 혼자 눈감으실 리 없으리라고 주문처럼 외어왔다. 하지만 이젠 세월과 함께 그 기대를 접어야 하나보다.

이젠 아내와 두 아이와 함께 네 식구가 9월 하순의 어느 한날을 기일(忌日)로 잡아 추도식을 드려야겠다. 아마도 하늘나라에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함께 우릴 내려다 보고 계시겠지.

오늘 밤에도 강 건너 신의주의 불빛이 안갯속에 가물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