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발발 5개월 전인 1950년 1월 17일 이주연 중국 주재 북한대사의 파견을 축하하는 연회가 북한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의 관저에서 수상 김일성과 북한 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스티코프에게 "중국이 혁명에 성공했습니다. 이제는 남조선을 해방시킬 때입니다"라며, 스탈린이 남침을 허가해주었으면 좋겠다고 공공연하게 떠들었다. 스티코프는 이날 김일성이 이 사람 저 사람을 붙잡고 스탈린을 만나게 해달라는 말을 연방 되풀이했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연회가 끝날 무렵 김일성은 몹시 취했고, 그의 말은 시종 흥분 상태였다고 한다. 반면 정작 초청자였던 박헌영의 이날 언행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그러나 그 전해인 1949년 8월 12일과 14일 스티코프와 김일성·박헌영의 대화 기록을 보면 이미 두 사람은 전쟁에 대해 의견 일치를 본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 여름휴가를 떠나기 직전 이들을 만난 스티코프는 "두 사람이 무력 남침의 필요성을 제기했다"고 보고했다. 스티코프는 이날 만찬에서 있었던 김일성·박헌영과의 대화를 스탈린에게 보고했고, 이들의 대화록은 1995년 공개된 구(舊)소련 비밀문서에 담겨 있다.

1949년 3월 모스크바에 도착한 북한 수상 김일성(왼쪽 두번째),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세번째), 부수상 홍명희(네번째)가 스탈린을 방문하기 위해 크렘린궁에 들어가고 있다.

2002년까지 잇달아 공개된 구소련 비밀문서에 따르면 김일성과 박헌영은 전쟁의 세부계획이 최종 결정될 때까지 늘 행동을 함께 했다. 스탈린으로부터 전쟁을 승인받은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 모스크바 방문 때도 김일성과 박헌영은 함께 했다. 이 방문에서 김일성과 박헌영은 스탈린을 면담하고 자세한 전쟁계획을 시달받았다.

그러나 1950년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戰勢)가 역전되면서 김일성과 박헌영 사이에 갈등이 불거졌다. 둘의 갈등은 주로 전쟁을 수행하는 작전에 대한 견해 차이였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해온다는 소식이 들리던 10월 8일 평양 모란봉 지하 김일성 집무실을 방문한 중국대사 예지량의 목격담에 따르면 박헌영은 "즉각 군대를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김일성은 "남조선 산속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벌여야 한다"고 언성을 높였다. 유엔군은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했다.

1950년 10월 1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명의로 모택동에게 군사지원을 요청한 편지. 김일성과 박헌영이 나란히 서명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의 갈등은 1950년 11월 7일 전화(戰禍)를 피해 압록강 연안 만포진에 설치되어 있던 임시 소련 대사관에서 열린 볼셰비키혁명 기념행사에서 폭발했다. 김일성은 전쟁이 열세로 몰리게 된 것에 대한 책임 공방을 벌이다가 박헌영에게 대리석으로 만든 잉크병을 집어던졌다. 두 사람 모두 취한 상태였고, 서로 막말을 할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했다. 전 동독 주재 북한대사이고, 당시 외무성 부상이던 박길용의 증언이다. 먼저 김일성이 소리쳤다. "당신이 들고 일어난다고 했던 빨치산들은 다 어디 간거야?" 박헌영이 "아니 어째서 낙동강에 군대를 죄다 내려보냈나"라고 반박하자 김일성은 흥분해 소리쳤다. "야, 이 자식아! 전쟁이 잘못되면 나뿐 아니라 너도 책임이 있어!"

출신 배경이 너무 달랐던 김일성과 박헌영은 1948년 9월 북한 정권을 구성할 때부터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박헌영은 8·15 광복 당시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이었다. 다른 공산주의자들도 일제 말기까지 국내에서 항일투쟁을 지속했던 박헌영이 광복 이후 조선공산당의 헤게모니를 잡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반면 소련군 장교 출신인 김일성은 정체에 대한 시비가 분분했지만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의 강력한 지원을 받으며 박헌영을 제치고 북한 권력의 1인자 자리에 올랐다. 나이가 김일성보다 12살 많은 박헌영은 김일성이 193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기 10년 전인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을 주도했다. 공산주의 활동 경력에서 대선배였던 박헌영에게 김일성은 소련을 배경으로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풋내기로 비쳤을 것이다.

김일성은 1953년 7월 휴전 후 전쟁 실패 책임을 박헌영에게 돌리고 그와 남로당 일파를 숙청한다. 박헌영이 '남로당원 20만 봉기설'로 전황을 오판하게 했다는 것이다. 박헌영은 1950년 4월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을 만났을 때, "전쟁이 시작되면 남한의 20만 남로당원이 봉기해서 인민군의 진격을 도울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전쟁 한 달 전인 1950년 5월 17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북한 당(黨)·정(政) 간부와 인민군 주요 지휘관 연석회의에서도 "인민군이 서울만 점령하면 남로당원이 들고 일어나 남조선 전 지역을 해방시킬 것이다. 인민군의 진격은 해방된 지역을 향한 승리의 행진이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김일성이 박헌영의 '남로당 20만 봉기설'을 믿고 전쟁을 일으킨 것은 아니다. 구소련 문서에 나타나듯 김일성은 스탈린과 모택동의 지원을 믿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김일성은 1954년 12월 23일 조선인민군 군·정 간부회의에서 "박헌영의 거짓말에 속았다"고 비난했다. "남조선에 당원이 20만은 고사하고 1000명만 있어서 부산쯤에서 파업을 하였더라면 미국놈이 발을 붙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남반부의 군중적 기초가 튼튼하고 혁명세력이 강하였더라면 미국놈들은 우리에게 덤벼들지도 못하였을 것입니다."

결국 박헌영은 1955년 12월 5일 반당(反黨)·종파분자·간첩방조·정부전복 음모 등의 죄목으로 김일성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는 북한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정통 공산주의가 막을 내리고, 광신적 개인숭배에 입각한 사이비 공산주의가 승리함으로써 봉건세습 전체주의가 권력의 역사를 이어가게 된 계기가 됐다.

[지금도 진행 중인 '6·25 전쟁' 기억은 끝나도 기록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