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8년 어느날 세종대왕이 중신들을 불렀다. 임금은 "대마도 왜인(倭人)들이 교역을 빌미삼아 너무 많이 몰려든다"며 이들의 체류를 제한할 방법을 물었다. 세종실록은 "중신들이 '(일본에) 사행(使行·사신 방문) 간 이예(李藝·1373~1445)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다시 숙의하게 하옵소서'라고 하자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고 적고 있다.

▶이예는 태종·세종 1401~43년 40차례 넘게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이무렵 그만큼 자주 일본에 다녀온 조선 관리는 없었다. 1426년 세종이 54세 이예를 일본에 보내며 "(일본을) 모르는 사람은 보낼 수 없어 그대를 보내는 것이니 귀찮다 생각지 말라"며 손수 갓과 신을 하사했을 만큼 독보적 대일(對日) 외교통이었다.

▶이예는 원래 울산 관아의 중인(中人) 계급 아전이었다. 1396년 울산에 일본 해적들이 쳐들어와 군수를 사로잡아 갔다. 이예는 해적선에 숨어들어 "군수를 모실 수 있게 해 달라"고 해적들에게 간청했고 결국 두 사람 다 풀려났다. 조정은 이예의 충성심을 높이 사 벼슬을 주고 사대부 양반으로 승격시켰다. 그는 종2품 동지중추원사까지 올랐고 이런 인연으로 학성(鶴城·지금의 울산) 이씨 시조로 받들어진다.

▶왕조실록이 전하는 이예의 공적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40여년 동안 667명의 조선인 포로를 협상을 통해 구출한 점이다. 8세 때 어머니를 왜구에게 납치당한 그로서는 남의 일 같지 않았을 것이다. 71세에 생애 마지막으로 수행한 임무도 대마도에 붙잡혀 간 포로 귀환협상이었다. 그는 건강을 걱정하는 세종에게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이 섬(대마도)에 출입한 신(臣)이 가는데 누가 감히 사실을 숨기겠습니까"라며 대마도행을 자청해 포로 7명을 데려왔다.

▶어제 외교부가 올해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로 이예를 선정했다. "대마도 같은 험지에서 국익 증진과 국민 보호에 헌신했다"는 점에서다. 그는 2005년 문화부 '이달의 문화인물'로도 뽑혔다. 일본에 여러 불경을 전하고 일본에서는 자전(自轉) 물레방아와 사탕수수를 들여온 공을 기렸다. 협상으로 포로를 구해내는 외교력, 노구(老軀)에도 적진에 몸을 던지는 용기, 600년 전에 문화·기술 같은 '소프트파워'의 중요성에 주목하는 혜안….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외교관이 바로 이예 같은 인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