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전 후반 7분. 그리스전의 승부에 쐐기를 박은 박지성의 골은 세계를 향한 한국 축구의 선언과도 같았다. 관중석을 향해 두 팔을 빙빙 돌리며 포효하는 박지성의 골 세러모니는 '한국 축구를 더는 아시아의 틀 안에 가두지 말라'는 선전포고이기도 했다. 박지성이 그리스 장신 수비수 2명을 뒤에 달고 그라운드를 질주하며 골 그물을 뒤흔들었을 때, 이를 지켜보던 전 국민의 심장은 쿵쾅거렸다.
박지성은 누가 뭐래도 한국 축구의 중심이다. 90분 내내 맹렬하게 그라운드를 누비는 박지성의 플레이는 한국 축구를 살아 숨 쉬게 하는 심장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동안 한국 축구는 똘똘 뭉친 정신력과 로봇 같은 체력으로 월드컵 무대를 두드렸다. 이마가 찢기고 머리가 터지는 태극전사들을 국민은 '투사(鬪士)'인양 대우했지만, 결과는 번번이 16강 진출 실패였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축구는 '박지성 이전'과 '박지성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선수가 기술로도 세계에서 통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 바로 이날 박지성의 골이었다. 박지성이 노란색 주장 완장을 차고부터 한국 대표팀의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얘기가 나온 지 오래다. 29세의 박지성이 자신만의 리더십으로 팀을 리드하기 때문에 가능한 얘기이다.
그리스전의 최우수선수로 뽑힌 박지성은 "개인적인 기록보다 팀이 이긴 것이 더욱 기쁜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입버릇처럼 "나보다 팀"이란 말을 달고 다닌다. 이 말이 더욱 돋보이는 까닭은 실제로 박지성이 자신의 기량 발전에만 몰두하는 이기적 스타와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는 2005년부터 세계 최고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다진 자신의 경험을 동료에게 전파하는 데 누구보다 열심이다. 박지성은 그리스전을 앞두고 동료에게 체격 조건이 큰 유럽 선수들을 상대하는 요령을 전파하는 데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조영증 대한축구협회 기술국장은 "박지성은 축구 말고는 딴 짓을 안 한다. 선수로서의 직업정신이 투철하기 때문에 계속 성장을 거듭하는 것"이라고 했다. 대표팀 막내였던 2002년 한일월드컵 때나 주장 완장을 찬 지금도 언행에 변함이 없는 것이 박지성의 리더십을 뒷받침하는 힘이다.
이런 박지성의 조용한 리더십은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가 바라는 리더의 자질인지도 모른다. 서울대 임현진 교수(사회과학대 학장)는 "박지성 선수는 성실함과 매너, 겸손함과 열정, 스캔들 없는 깨끗한 품행 등 한국 사회가 원하는 '스타'의 자질을 갖췄다"고 말했다. 남아공월드컵을 보는 한국팬들은 지금 '박지성 신드롬'에 빠져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