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출판 시장에서 새로 나오는 책의 양만 놓고 보면 사상 분야에서는 노장(老莊)이 대세다. 서양철학의 쇠퇴와 유학(儒學)의 부진 속에서도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에 관한 책은 꾸준히 국내외 저자들의 저술과 번역이 나오고 있다. 노자는 지난 3월 나온 야오간밍의 '노자강의'(김영사)를 비롯해 함석헌의 '씨알의 옛글풀이'(한길사) 등이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장자도 최근 안희진의 '장자 21세기와 소통하다'(시그마북스), 나카지마 다카히로의 '장자, 닭이 되어 때를 알려라'(글항아리) 등이 번역됐고, 강신주의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그린비)도 젊은층을 중심으로 인기다.
왜 지금 여기서 다시 노장인가? 얼마 전 재직 중인 대학의 철학과 전공 강의로 '노장' 사상을 강의할 때의 일이다. '노장' 강의는 다른 강의에 비해 두 배가 넘는 학생들이 수강한다. 그 이유가 궁금해 한 학생에게 물었다. "왜 이 강의에 들어왔죠?" 그 학생은 주저없이 답했다. "혹시나 마음의 위안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순간 망연자실했다. 하지만 '마음의 위안'이란 표현만큼 '노장(老莊)'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잘 보여주는 말도 없지 않을까!
노장의 이같은 인기는 출판이나 대학 강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곳저곳에서 열리는 인문학 강좌 가운데 노장 강좌는 사람들이 많이 몰린다. 그 이유는 노장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사람들이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자'와 '장자'는 종교문헌이고, 철학문헌이며, 페미니스트가 애호하는 문헌이자, 과학사가나 과학철학자에게도 매력 있는 문헌이다. 이처럼 '노자' '장자'에는 없는 게 없다. 그래서 '노장'은 만병통치약처럼 읽혀진다.
그러나 이렇게 요즘 각광받는 '노장'은 100년 전만 거슬러 올라가도 '이단(異端)'이라는 금기의 규정에 속박당해 있었다. 조선조 내내 '노자'와 '장자'는 '태워버려야 할 책' '읽지 말아야 할 책'이었고, '최고의 경지에 오른 유학자들만이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그래서 이이(李珥)가 유학자의 입장에서 '노자'를 재편성한 '순언(醇言)'을 비롯해서 유학자들의 '노자' '장자' 주석서는 대부분 그들의 문집에서 제외되었다. 읽었지만 읽지 않은 책, 썼지만 쓰지 않은 책인 것이다.
'이단'이었던 노장은 근대와 조우하면서 운명이 바뀐다. 전통사회를 지탱하는 강고한 이념이었던 유학(儒學)이 봉건(封建)과 전근대(前近代)의 온상이라는 죄명으로 스러지면서 '노자' '장자'는 철학과 종교, 그리고 과학이라는 눈으로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했다. 유학의 비판자였던 노장은 이른바 '오래된 미래'이자 '포스트모던'으로 통하는 새로운 전통이 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노장에 열광하는 최근 현상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노자'와 '장자'의 해석 전통에는 합의된 체계가 없다. 좋게 말하면 해석의 자율성이 보장되었던 것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이었던 것이다.
20세기 초 서양으로 유학했던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에게 노장은 "당신들에게는 어떤 철학과 형이상학이 있는가?"라는 서양인들의 질문에 답변하기에 적절한 대상이었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비존재로부터 생성된다"[有生於無]는 구절은 근대의 논리적 세계관에 대적하는 동아시아의 '신묘한' 형이상학이었고, "도를 도라 말하면 그것은 영원한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라는 구절은 서구적 논리를 뒤집는 동아시아적 논리가 되었다. 이러한 언명들의 역사적 배경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에게도 너희들이 말하는 고상한 형이상학과 존재론, 언어철학이 "있었다"는 위안이 중요했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20세기 초반부터 "있었다"의 방어논리가 양산한 갖가지 해석과 사조들은 대중들에게는 여전히 굳건한 '상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한 해석 가운데에는 의미 있는 담론도 있다. 함석헌의 노장 이해는 대표적인 성과라 할 수 있다. 함석헌은 노장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독재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논리, 생태계 파괴에 대한 비판과 자연보전의 대안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노장 사상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다시 한번 탈바꿈한다. 노장에 풍부한 유학 비판의 논리와 요소들이 서구 현대철학의 근대 비판, 주체 비판과 유사한 방식으로 재생산된 것이다. 더불어 새롭게 등장한 갖가지 비판 담론들이 모두 노장과의 접속을 말하기 시작했다. 도올 김용옥이 노장을 21세기와 연관지었던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그래서 노자와 장자는 고대적 페미니스트 이론가이고, 환경 담론의 원조였으며, 철학적으로는 해체론자가 되었다. 우리에게도 그런 것이 "있었다"의 논리가 다시 한번 부활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이런 물음을 한번 던져봐야 하지 않을까? "그래 있었다! 그런데 그래서 어쨌다는 말이냐?"라고. '노자' '장자'에는 기이한 논리와 냉소적인 비판은 가득하지만, 우리가 어떤 규범과 이념으로 삶을 이끌어가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오로지 거기에는 '오래오래 사는 법'[長生久視之道]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개인화'의 경향이다. 규범도 싫고, 간섭도 싫은 개인화. 어쩌면 노장의 유행이 우리네 삶의 '고립된 개인주의화'의 징표가 아닐까 싶어 두려울 때가 있다.